선교의 성서적 근거
Ⅰ. 서 론
만일 복음이 진정으로 삶과 죽음의 문제라면, 지금 세계에 생존하고 있는 어느 사람도 복음을 듣고 또한 받아들이는 계기를 가져 보지도 못하고 자기의 일생을 마친다는 것은 도저히 허용될 수 없는 일 일 것이다. 초대 교회는 선교적 사명의 특성에 대해 깊이 고찰하기 전에 이미 수세기 동안 복음을 전파해 온 것이 사실이다. 즉 그들은 선교를 아주 자명한 것으로 생각하고 선교를 수행해 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선교에 대한 신학적 검토나 이론적 반성이나 논의가 제기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점차로 변화되어 가는 세계와 함께 20세기를 맞은 세계 선교 단체들은 세계 선교 협의회의 첫 모임인 에딘버러(1910)부터 선교는 무엇이며,. 왜 해야만 하는가 등의 문제가 서서히 논의되기 시작했다. 그 후 선교에 관한 신학적 논의와 토론은 현대 신학의 주제를 '선교'의 집중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가오는 21세기는 오늘날보다 더 다원화된 사회이고 복잡하다. 이러한 사회에서 선교는 초대 교회처럼 단순한 사명감으로는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기 어려워진다. 그러나 아무리 시대가 악하고 다원화되더라도 선교를 멈출 수는 없다. 이러한 시점에서 성서적 선교의 검토와 Missio Dei의 신학을 살펴보고 여기에 덧붙여 사도 바울 이후 19세기 선교사들 중 큰 비전을 갖고 체계적인 계획을 세워 광대한 지역을 복음화시킨 허드슨 테일러의 선교관을 접목시켜 21세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선교의 사명을 보다 더 효율적으로 수행하고 참 선교의 방향을 잡기 위한 모색으로서 검토하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Ⅱ. 선교의 성서적 근거
1. 복음서에 나타난 선교
기독교 선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서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다. 성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부르시는 선교의 책인 동시에 구원의 복음을 온 세상에 알리는 선교의 책이다.
1)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선교
복음서 기자들은 구약에서 예언된 하나님의 구원의 사업이 예수를 통하여 성취하게 된 것을 말하고 있다. 이 예수의 생애와 활동은 약속의 시대가 그 종말을 고하고 약속의 성취의 시대라는 새시대가 시작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마가는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라는 말씀을 통해 이를 증거한다. 또한 예수는 그의 임박한 수난과 죽음에 대해서도 자주 언급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실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까와져 왔으나 예수의 임박한 수난과 죽음이 선행되기 전에는 이 왕국이 완전히 실현될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이유로 4복음서 기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 이전에 있어야 될 중간기적 시기를 묘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예수의 잔치 비유에서 손님들이 채워져야 잔치가 시작될 수 있는 것과 단란트의 비유에서도 모든 것이 왕국의 완성을 위해서 성숙해 있으나 주님의 종들이 주께서 남겨 두신 단란트를 가지고 일해야 할 시기가 먼저 있어야 한다는 점등이다. 그러므로 종들은 이 기간 동안에 주님의 은사들을 가지고 모든 사람들을 왕의 혼인 잔치에 초대해야 하는 사명을 갖는 것이다. 따라서 이 중간적 시기는 선교의 명령으로 충만해 있다고 볼 수 있다.1)
2) 예수의 이방 선교
예수는 구약에서 말하는 여호와의 신실한 종이었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인류 구원의 성취를 위해 하나님을 대표했으며 행하라 하신 일에 자기를 제한하면서 충성을 다했다. 또한 그는 이스라엘을 택하셨으며 이러한 택함은 그 본질이 절대적인 것이 아닌 광범위한 의미에서였다. 예수는 선민 이스라엘의 이러한 중보적 기능을 통해서 모든 인류를 그리스도에게 불러모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계시하였다. 즉, 예수의 이스라엘에게 선포한 구원은 예수의 속죄의 죽음이 온 이스라엘을 위한 것임과 마찬가지로 온 세상을 위한 것이었다.
3) 선교의 대사명
복음서의 선교의 대명령은 예수가 전 인류를 위한 십자가의 고난과 영광의 부활 후 제자들에게 준 것이다. 예수님의 사역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은 그 십자가상의 죽음과 부활이었고 이 두 사건은 하나님의 본래 계획의 일부였다. 그후 예수께서는 부활과 승천 사이에 40일간 제자들과 지내면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는데 선교의 대명령은 4복음서와 사도행전 1장에 기록되어 있다. 선교의 대명령은 모든 시대의 교회에 대한 명령인데 이것은 교회의 최대 과제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막16:20)" 여기에서 우리는 선교의 대명령의 함축적인 의미를 찾아볼 수 있는데 결국 교회의 범세계적 선교는 그리스도의 선교를 계속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이와 같이 교회와 그리스도와 하나님은 모두 선교 사역에 연결되어 있으며 성령의 인도에 따라 행하여지고 있다. 선교하는 일은 한 마디로 말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의 증인이 되는 일이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전파하고 그 일의 산 증인이 되는 일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선교 명령은 다른 각도에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라는 명령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일은 그의 증인이 되는 일이다.
2. 사도행전에 나타난 선교
1) 사도행전 선교의 근거
사도행전은 성서 중에서 가장 우수한 선교 문서이다. 사도행전은 교회가 세워지는 과정을 잘 알려주는 선교의 책으로서 각 분야에 대한 자료들이 풍부하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는 것을 누가가 사도행전 전체를 이 구절을 중심으로 기록했고 이것은 모든 지역이 다 선교의 동일한 대상이라는 것을 뜻한다. 선교 학자 바빙크는 사도행전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선교의 근거를 다섯 가지로 분류했다. 그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해 보면 첫째, 사도행전에서 선교의 역사는 영광스럽게 된 그리스도의 역사로 묘사되어 있다는 것이다. 둘째, 사도행전의 선교 활동은 종말적인 사건들과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 속에 속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는 점이다. 예를 들어 오순절의 결과로 나타난 선교의 계속적인 활동이 있을 것이다. 셋째, 그리스도 자신이 선교의 주인이지 교회가 선교의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이 크게 강조되어 있다는 점이다. 넷째, 사도행전은 평신도 전파 자들의 활동을 자주 언급하고 있다. 개인적인 전도는 초대 교인들의 단적인 표현이며 바울은 그의 서신서 에서도 많은 신도들의 전도 행위와 협력을 이름을 들어 소개하고 있다. 다섯째, 사도행전은 복음 전파에 중요한 역점을 두고 있으면서도 새로 형성된 교회 생활에 매력을 느끼고 자발적으로 그 생활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도 주의를 환기시킨다. 즉, 진정한 복음의 의미를 가르쳐 준다는 것이다.2)
2) 사도행전 선교의 과정
초대 교회의 선교는 이방 선교에 대한 명령이 구체적으로 그 실천에 옮겨지기까지는 오순절 성령 강림 후 온 유대인들과 개종한 이방인들이 복음의 첫 열매가 되었고 스데반 순교 후 신자들의 피난으로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갈릴리 전도가 시작되었으며 사도 바울의 소명과 회심 사건, 그리고 고넬료의 회개로 인한 예루살렘 교회 안에 이방 선교의 문호가 열림과 동시에 이방 선교에 진출하는 역사적 전환점이 되는 과정을 거쳤다. 이러한 사건은 성령의 개입과 관여를 통하여 이루어진 사건이었다. 그러나 초대 교회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방인 문제였다. 이방인을 할례 없이 받아들일 것인가? 또는 거부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둘러싼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간의 긴장 관계였다. 이것은 할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유대계 기독인들과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할례 문제가 아니고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바울의 주장이 맞닥뜨리게 되었는데 안디옥 교회는 유대인에게 전도함을 시발로 유대인이 이방인에게 전도하고 이방인이 이방인에게 전도함으로 인해 선교하는 교회, 성서적 교회의 중심이 되었다.
3) 사도행전 선교의 방법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모든 선교의 방법은 성령에 의한 선교이지만 분명한 방법이 나타난다. 첫째, 집단 단위의 전도이다. 베드로와 바울등 전도자들은 그룹 단위로 회심을 불러 일으켰다. 둘째로 사도행전의 전도는 동역의 원리이다. 베드로나 스데반의 전도는 단독으로 한 것 같이 보이나 바울에게서는 "우리"라는 표현이 많다. 개인주의, 영웅주의의 선교 활동이 아니라 Team선교이다. 셋째로 사도행전의 선교는 선교와 문화의 문제를 잘 해결하였다. 신약의 최초의 총회인 예루살렘 총회는 정치 총회가 아닌 선교를 위한 총회로서 복음과 유대의 의식과 문화를 분리하고 더 이상 유대인의 의식을 이방인에게 부과하지 않고 다만 이방인의 부도덕을 금지하도록 하였다. 넷째로 사도행전의 선교는 대도시등 전략적 가치가 있는 곳에서 시작하였다. 바울의 선교는 도시 교회인 안디옥 교회에서 시작하여 빌립보, 데살로니가, 고린도, 아덴등 지방의 중심 도시에 먼저 들어가 교회를 세웠다. 다섯째로 사도행전의 선교 전략은 어떤 상황에서도 그리고 모든 수단과 가능성을 이용한 선교였다.3)
3. 서신서에 나타나는 선교
1) 소명 의식
서신서에 나타난 선교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사도들의 소명이다. 이 소명은 사도들의 믿음에 근거한 것이다. 바울은 각 서신서의 서두에서 자신의 신분을 해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에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1:11-12)"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의 신적 기원을 천명한다(롬1:5, 갈1:15, 고전1:1등). 베드로가 유대인의 사도된것 같이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임을 확신하였다(롬11:13, 15:16). 그는 사도의 권위를 교회나 외부의 어떤 기구에 호소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복음을 전하는 자로 임명하였음을 확4신하였기 때문에 그의 사도성을 의심하는 자들에 대하여 단호한 태도를 취했다. 바울은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고전15:10)"라고 했으며 또한 그는 사도 중에서 "지극히 작은 자"라고 겸손하였으나 그의 사도직이 권위가 작은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였다. 그는 이방 교회의 초빙을 받으며 놀라운 사역을 통하여 사도됨을 입증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선교의 성패는 그 방법과 원리도 중요하지만 소명 역시 중요한 요소임을 깨달을 수 있다.
2) 선교의 메시지
바울은 자기 자신을 복음의 선포자라고 했으며(딤후1:11) 그는 자기의 선교를 "케리그마"라 했다. 바울의 복음은 당시 유대인과 헬라인 그리고 로마인들에게 전해졌다. 이것은 현재 우리가 접하고 있는 여러 가지 이념-이교주의, 인도주의, 민족주의, 공산주의, 혼합주의 등-의 상황과 크게 차이가 없을 것이다. 바울은 이들 모두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복음을 전파하는데 많은 문제점과 어려움을 안고 있었지만 결코 복음 전도에 있어서 위축되지 않았다. 바울은 전도자는 성령과 말씀임을 확신하고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기도 하였다(고전2:2). 이 점에서 바울의 신학은 그리스도 중심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바울의 복음은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믿으며 복음의 대상자에게 역사 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믿는 사도였음을 알 수 있다.
Ⅲ. Missio Dei 신학의 특성
에큐메니칼한 국제 사회에서 "하나님의 선교"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952년 빌링겐(Willingen) 세계 선교 협의회 대회 때부터 였으며 이 선교의 개념을 좀더 이론적으로 정립하고 신학화한 사람은 휘체돔(G, Vicedom)이었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하나님의 선교"라는 선교 개념은 세계 교회에 널리 수용되면서 1960년대 이후 WCC의 지배적인 선교의 개념으로 등장했다.
"Missio Dei"라는 개념은 어느 한 신학자에 의하여 창안된 개념이라기 보다는 20세기 에큐메니칼 운동의 과정에서 발견된 개념으로 종래의 선교 신학적 사고의 전환을 가져온 WCC를 중심으로 한 신학 사상의 핵심이기도 하다.
1952년 빌링겐 회의에서는 Missio Dei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채택하고 있다. 선교란 단순히 주님의 말씀을 향해 복종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공동체의 회집에 대한 의무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선교한 구원받는 전 피조물 위에 그리스도의 주권을 세우려는 포괄적인 목표를 가지고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 한 지체로서 참여하게 되는 선교 운동의 근본은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 안에 있다.4) 따라서 하나님의 선교는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계획하고 계시는 모든 것-하나님의 구속의 나라가 완전히 성취되는 일-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주어서 사람들이 죄와 세상 나라로부터 해방되어 다시 하나님과 사귈 수 있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이다.5)
휘체돔은 선교와 선교하는 교회는 하나님 자신의 일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의 의지 안에 그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선교와 교회는 서로 독립적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이상과 같은 견해는 선교에 대한 봉사가 교회에 대한 봉사의 지체로 이해하려는 선교론을 극복하고 교회에 대한 모든 봉사가 오로지 선교에 이바지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렇게 선교는 철저히 하나님 자신의 행위 속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다.6) 이와 같은 하나님 선교의 개념은 전통 교회의 선교의 개념과는 몇 가지 점에서 아주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의 선교 신학의 입장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강조하므로 교회의 선교와는 대치되는 입장이다. 왜냐하면 구원이란 오늘의 사회적인 도전과 역사적인 요건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이는 곧 그리스도의 복음이 개인의 영혼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개인이 살고 있는 사회 조직과 세계를 포함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개인의 구원과 사회의 구원의 통합을 강조하는 것이다.7)
둘째, 전통적인 선교 개념은 세상에 대한 교회의 사명보다 교회의 본질을 더 중시하며 교회의 정통성과 교회의 순수성에 더 역점을 두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교의 개념이 전통적인 선교의 개념과 구별되는 점은 교회가 선교의 도구가 된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교회의 본질보다 사명에 더 중점을 둠으로써 교회론의 관심도 정적인 교회관에서 세상을 향하여 능동적이고, 개방적이고, 동적인 교회관에 치중한다는 것이다. 즉 제도화한 교회가 그 제도와 그 제도의 확장을 지나치게 절대화한 나머지 하나님에게만 속한 복음과 그 선교를 일방적으로 교회 자체를 위한 수단으로 되어 버릴 때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도 배반되고 교회 본연의 사명에도 위배된다는 것이다. 교회 중심의 선교 신학을 하나님 중심의 선교 신학으로 대치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선교'이며 원천적인 선교는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하고 계심으로 교회는 이 선교를 위한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기능은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함으로써 세상 적인 사건에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일이다.8) 셋째로 선교하는 교회의 구조는 더 나아가서 평신도를 중심으로 한 교회 구조이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지금까지 교회 안에 여러 직분은 주로 교회 자체만을 위한 기능에 봉사해 왔다는 것이 '하나님의 선교'적 견해이다. 이런 구조에다가 선교적 과제나 사명만 추구한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평신도야말로 원칙적으로 선교의 위임을 받아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다. 이 선교의 역군들을 교회 안에서만 머물게 하지 말고 그들을 훈련시켜서 세상에 보내는 훈련장으로서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9)
끝으로 지적되어야 하는 것은 역사와 세계에 대한 이해이다. 즉, 하나님의 선교의 신학은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이 그 중심 사상이다.
Ⅳ. 결 론 (허드슨 테일러와 Missio Dei의 접목)
지금까지 선교의 성서적 근거와 현대 선교 신학의 맥락을 이루고 있는 하나님 선교 신학과 그 특성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Ⅱ에서는 선교의 성서적 근거에는 예수님의 파송, 그리고 그 파송에 따른 종말적인 개념과 이방인에 대한 예수의 선교의 대사명을 검토하면서 아울러 사도들, 특히 바울을 중점으로 선교의 방법과 그들의 선교 의식을 살펴보았다. Ⅲ에서는 하나님 선교의 신학을 검토했는데 하나님의 선교란 선교가 단순히 주님의 말씀을 향한 복종이나 공동체의 회집에 대한 의무만을 뜻하지 않고 구원받은 전 피조물 위에 그리스도의 주권을 세우려는 넓은 의미의 목표를 가지고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것이다. 즉 선교는 하나님께 속한 일이며 하나님이 선교의 주체일 뿐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활동이 된다는 뜻이다.
이제 여기서 우리는 본론에서 살펴본 성서적 선교를 바탕으로 하나님의 선교 신학을 허드슨 테이러의 선교 방법과의 연관성을 두고 평가함으로써 앞으로 한국 교회의 선교 개선점을 찾고자 한다.
먼저 선교는 그 본질상 교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서 나온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의 살아 계신 하나님은 파송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아브라함에게 축복의 언약을 주시며 하신 말씀이 그렇고 모세를 애굽의 압박에 눌려 있는 자기 백성에게 보내실 때 출애굽의 약속과 출애굽 후 계속해서 선지자들을 보내시며 경고와 약속을 하셨고 죄악에 빠진 백성을 구하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부활, 승천 후 성령을 보내심이 그렇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선교는 하나님의 선교라는 점을 유추할 수 있다. 덧붙여서 허드슨 테일러는 그의 선교의 가장 중심 되는 사상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믿음과 오직 기도로서 만의 마음 자세와 심지어 제정 지원과 후원 문제에서도 정규적인 봉급을 약속하지 않고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지하며 인간적인 도움을 의존하지 않도록 헌금을 호소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는 등 자체적 선교회 조직으로 교회 중심의 선교가 아닌 하나님 중심의 선교에 맞추고자 하였다.
둘째로, 선교는 '섬김'의 선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파송되어질 때에 인간의 구원과 아울러 섬김의 목적을 가지고 오셨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그래서 그는 타인을 위하여 자신을 던져 섬기셨다. 그러므로 선교는 예수의 선교처럼 섬기는 선교가 되어야 한다. 허드슨 테일러의 경우 선교의 비전을 놓고 철저한 자기 부인의 훈련을 통해 오직 믿음으로 살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중국 복음화 당시 그는 선교사들의 수치스러울 정도의 활동에 환멸을 느껴 중국 복음화 선교회를 탈피, 후원자 없는 독립 선교의 모형이 되었고 자식과 부인을 잃어 가는 그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죽을 때까지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모습을 잃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섬기는 종으로서의 모습을 우리는 마가복음 10장 45절에서 찾을 수 있다.
셋째는 개인 구원과 사회 참여와의 관계이다. 여기서 개인 구원은 우리가 잘 아는 전도일 것이다. 즉, 전도는 선교의 구성 요소로 볼 수 있는바, 선교는 전도의 사회 참여를 더한 것으로 정의될 수 있다. 그러나 전도는 선교의 구성 요소 이상의 것이며 선교 또한 전도와 사회 참여를 합한 의미 이상의 것이다. 선교는 하나님께서 모든 만민을 구원하시려고 주신 과제인데, 이것은 활동하는 교회, 개방적인 교회, 이웃을 위하는 교회, 세계로 향하는 교회가 됨으로써 개인 구원과 사회 참여를 합한 선교의 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 내지 선교라는 자체적인 선교 조직을 통해 교파에 속하지 않는, 그리고 영국의 많은 노동자들 중에서 헌신적인 남녀 노동자를 선교의 주역으로 택함으로 해서 진정한 선교의 방법을 찾았고 빠른 중국 내지 선교의 노력의 일환으로 중국인 복장과 변발을 하면서 폐쇄적이지 않고 이웃을 위하며 중국 전역의 복음화라는 세계적인 교회 선교의 모체가 됨이 분명하다.
서두에서도 밝힌바 있지만, 21세기는 다원화된 사회이다. 이러한 시대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 명령은 계속되어져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앞으로의 한국 교회의 선교는 교회의 유지 수단으로서의 선교, 목회 방편으로서의 선교가 아니라 그 선교의 본질이 하나님에게서부터 나온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며 그 선교는 지배의 선교, 단순한 식민지적인 확장의 선교가 아니라 섬김과 겸손의 선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개인 구원의 측면과 사회 참여의 측면의 일치점의 선교도 바로 이러한 섬김의 역할에서 나와야 할 것이다.
♣ 참고 문헌 ♣
1. 김 명 혁, 선교의 성서적 기초, 서울 : 성광문화사, 1983.
2. 바 빙 크 J. H. 선교학 개론, 전호진역, 서울 : 성광문화사, 1983.
3. 휘 체 돔, 하나님의 선교, 박근원역, 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1980.
1. 바빙크, 선교의 성서적 기초, p.24>
2. Ibid, p.32.
3. Ibid, p.33.
4. G. Vicedom, Missio Dei, 박근원역(서울:대한 기독교서회, 1980), p.16
5. Ibid, p.67.
6. Ibid, p.17.
7. 박근원, 오늘의 선교, p.147.
8. Ibid, p.148.
9. Ibid,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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