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5-06-13 15:55
[4] 시리아-팔레스틴, 성서 고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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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33  

3.대화로서의 새로운 성서 고고학을 향하여

위에서 언급된 발전은 적절하고 필연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많은 것이 위압적으로 발견된다는 관점을 야기한다; 새로운 세속적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이 더 이상 성서의 설명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라는 가능성. 결론적으로 우리는 정확히 그 반대가 참이다, 즉 새로운 성서 고고학이 출현하고 있음을 보여줄 것이다. 이것은 두 학문 사이의 새롭고 실속 있는 대화의 가능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대화의 방식에는 강력한 장애물이 잇다. 많은 관찰자들은 두 학문이 더 멀어질 것이고, 그런 증거도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고고학자의 잘못을 우선적으로 고려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몇몇 비평이 그것을, 과도하게 전문화 된, 편협한 전문가적인, 인문과학자이기 보다는 기술자 같다고 지적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이 명료한 사실은 성서 고고학의 변호자들이 고고학을 통해 타당성 있는 성서적 역사와 믿음이라는 그들의 프로그램을 수행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과 그리고 포기했음을 뜻한다. 또 한편으로는 성서학자들이 원래적인 역사-비평적 관심에서 점점 더 문학적 관심, 구조적 언어학, 언어의 원역사적 이해, 정경적 비평 등의 관심으로 옮겨가고 있음을 뜻한다. 이런 모든 경우에서 고고학은 단순히 부적절한 것으로 간주되는-역사 뒤의 역사-성서 텍스트의 가선과 그것의 원래적인 맥락을 회복하려고 한다. 역사는 단순히 해석학이 된다. 우리는 Albright와 Wright가 그랬던 것처럼 고고학의 축적, 외연적 자료의 저장, 문학에서 전통의 뒤를 꿰뚫어 보는 그것의 독특한 능력이 없이는, 보다 객관적인 세속적 역사에 대해서 성서 연구는 항상 주관적 사색으로 퇴보할 위험이 있고 신학적, 역사적 확신도 수행하지 못할 위험이 있다. 성서 텍스트가 역사적이거나 적어도 역사성을 갖고 있다면, 단순히 종교공동체가 그들의 시대와 환경에서 그들의 필요를 위해 고안된 사건들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과거에 정말 일어났던 것이라는 문제가 된다.

신고고학과 현대 성서학 사이의 새로워진 대화가 이루어질 만한 성숙한 때가 되었다. 그러한 대화는 아주 적절하다. 왜냐하면 양쪽 학문은 이제 긍정적인 알브라이트주의자의 논제로부터 떨어져서 비록 똑똑히 말할 수 없고 비자기의식적이지만 공감대로 드러나는 것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새로운 세속적 고고학은 옛 고고학보다 ‘대화’에 공헌하는데 더 적합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의 가정에 있어서 보다 더 전문적이고 보다 개방적이고 보다 유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고고학 연구에서 적절하게 한 것이 거의 없는 특정 경향의 신학적 관점에 덜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성서문학협회에서 20년전에 행한 Moton Smith의 연설을 언급할 것이다; 이스라엘의 축적된 역사 때문에 우리는 능력 있는 고고학자들에 의해 꽤 객관적이고 독립적으로 결정된 고고학적 사실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능력 있는 문헌학자에 의해서 성서 텍스트도 또한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 다음에야 우리는 그 둘을 비교하기 시작할 수 잇다. 그러나 고고학이 특별히 대화에 공헌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또는 그것들의 최종 연구에서 성서 고고학에서 가장 뛰어난 대표자 2명에 의해 전환된 국면을 사용하는데 공헌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물론 언급되었던 ‘고고학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텍스트에 대한 인공물(artifacts)와의 관계, 문화에 대한 물질 문화와의 관계, 역사에 대한 고고학과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다.-이것들은 후기-알브라이트주의자후기-긍정주의자, 낙관주의자(positivist) 시대에 다시 생각해야 할 것들이다.

a.텍스트의 유적(remains)들과 그것들의 공헌

문학 해석의 과업이 전문가들에게 잘 남아 있는 반면 고고학자들은 우리에게 고대와 현대라는 해석의 근본적인 문제 때문에 역사의 출처로서 텍스트가 제안되어졌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래서 히브리 성서는 아주 후기에 편집된 문서로서 역사가들에 의해 간주된다; 그것은 그 재료 안에서 고도로 선택되고 불완전하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엘리트적인 관점을 지향해서 편집되었다. 성서는 신정(神政)의 역사이다. 뻔뻔스러운 선전이 때로 있지만, 역사(history)가 아니라 성역사(Heilsgeshichte)이다. 히브리 성서에서 거의 혹은 전혀 객관적인 역사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구약 히브리 성서만의 문제가 아니다.

고고학은 고대 이스라엘의 족장 시대나 정복 시대를 회복시키는 것만큼이나 역사적 예수를 재발견하려는 과업을 더 이상 직접적으로 도울 수 없다. 역사가로서 우리는 성서가 ‘무엇이 발생했나’를 묻지 않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했는가?’를 묻는다는 사실에 의해 궁극적으로 한정되어져야 한다. 물론 조직신학은 더 나아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묻는다. 다른 형태로 지적하자면, 고고학은 작지만 의미 있는 방법으로 도와야 한다. 더욱이 해석의 문제를 고려함에 있어서 텍스트는 많은 말을 하지만 유적은 침묵한다는 평범한 언급을 남겨 놓아야 한다. 얼마나 효과적으로 각 계층의 자료가 우리가 의존하고 있는 과거의 실재들을 중재시키는가? 얼마나 기술적으로 조심스럽게 그 자료들이 해석되는가? 인간 사상과 행위의 상징적인 표현보다는 실제로 제시되어 있는 쓰여진 이적(sign)에 의해서 성서 텍스트는 어떤 다른 것에서보다 자신이 품고 있는 증언에서 더 이상 객관적이 아니라 고고학적 표본만큼 더 이해될 수 없다. 유물보다 더 명백한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증거의 유형 사이에서 우리는 다른 시간과 환경, 장소에서의 ‘의미’를 ‘해독’해야 한다. 그 다음에 이것들을 우리의 상황에 맞도록 ‘번역’해야 한다.

텍스트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해석의 역할과 유물 사이의 유비는 더 잘 수행될 것이다. 인간의 용어로 적어도 성서 자체는 과거의 유물이다. 성경을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삶과 사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독특한 면이 잇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서는 ‘성서의 원래 맥락과 관습이라는 것’을 ‘회당과 교회에서 항상 재해석되어져 그 시대에 경전이 되어져 온 것’과 합친 것임은 명백하다. 세속적 역사가들에게는, 문학 자료로서 성서와 고고학에 의해 조명 받아 온 다른 텍스트 사이의 우선적인 차이점은 성경이 결코 버림받거나 잃어버리지 않고 오히려 계속 아직도 살아 있는 공동체에 의해 간수되고 번역되어 왔다는 사실에 잇다. 그래서 고고학적 용어로 성서는 ‘보호받는 유물’로 우리가 부르는 것이다. 해석의 문제는 비슷하다. 그러나 약간 다르다.

b.인공적 유적들과 그것들의 공헌

보호되어지고 있는 고대 팔레스틴 자료의 대부분은 텍스트가 아니라 인공적인 가공물들이다. 그러한 자료들은 종종 불성실하게 보호되고 어떤 경우에는 고고학적 기록으로 남아 있어야 할 것들이 불규칙하게 표시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의미를 제공하는데 필수적인 맥락은 사라져 버리고 잘못된 발굴로 인해 잘못 이해되기도 한다. 안타까운 이들 물질적 유적-과거의 흔적-으로부터 우리가 배울 수 있는, 텍스트 연구를 보완, 보충하는 역사와 문화는 무엇인가?

우리는 위에서 신고고학이 옛고고학보다 얼마나 더 잘 조명하는지 보여주려 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첫째, 고고학은 성서가 출현하는 맥락, 없으면 완전한 이해가 불가능한 물질적, 문화적 맥락의 지식에 공헌해야 한다. 고고학 혼자서 고대 근동 상황, 이웃 나라와 민족, 문화들을 소생시킬 수 있다. 이것은 성서가 신빙성 있게 묘사될 수 있는 배경을 제공하는 것이다-직접적이고, 생생한 실재로-우리가 경전으로만 읽었을 땐 가질 수 없는, 혹은 원래 기원으로부터 오랫동안 격리되어 있던 문학으로 읽었을 땐 가질 수 없는 신빙성으로, 둘째로, 그것은 역사적, 신학적 사건에 대한 궁극적인 설명을 할 수 없지만, 고고학은 적어도 우리가 ‘변화의 생태학’이라고 부르는 것을 제공해 준다. 어떤 시대에서도 고고학은 이들 변화가 자연 환경과 팔레스틴의 긴 정착 역사의 맥락에 맡겨져 있던 것처럼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팔레스틴의 지역 상황을 증명할 수 있다. 그래서 고고학은 고대 성서 기자에 대한 역사적 종교적 긍정에 대한 반대 뿐 아니라 무관심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고고학은 환경, 문화, 기술, 사회경제적 변화를 평가하는 것을 우리 현대인이 유용하게 발견할 수 있는 다른 요인을 이해시키는 부분적인 설명을 할 수 잇고 해야 한다. 이들 강력한 변화의 동인들과 관련해, 성서는 우리에게 거의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다. 고대 팔레스틴의 대등하고 보완되는 ‘자연적 역사’와 ‘세속적 역사’는 오직 고고학을 통해서만 복구되어질 수 있다. 그리고 우리 제안에 대해 새로운 도구를 가지고 이제 시작이다. 여호수아서와 신명기 역사가의 작품은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의 등장을 여호수아의 기적적인 선물로, 여호수아의 영도 아래 12부족의 급작스럽고 통일된 군사 정복의 결과로 묘사한다. 그러나 고고학적 증거들은 B.C.1200년전 후기 청동기 시대 팔레스틴의 가나안 유적들이 파괴되지 않았다는 의심을 보여 준다. 그리고 초기 이스라엘 정착지로 밝혀진 거의 모든 곳이 평화롭게 더럽혀지지 않았다는 땅에서 설립되었음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세속적인 역사가의 관점에서 이스라엘의 정복은 부분적으로 점진적이었으며, 후기 청동기 제1철기 시대의 지평에서 사회경제적 변화의 아주 복잡한 과정이지 기적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고고학은 동전의 다른 면을 보여 준다. 즉(아날학파의 시도처럼) 몇몇 경우에 대중 문화, 민족 종교, 가능하면 개인의 역사조차 보여 준다. 예를 들어, 히브리 성서에 반영되어진 표준적인 이스라엘 종교는 아마도 야웨주의적이지만 고고학은 민족 종교가 아주 혼합 종교였으며 가나안 풍요 다산 종교에 고대 이스라엘 종교 제의가 강하게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 준다.

D. 결론

이 논문에서 우리는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과 성서 고고학의 역사, 그들의 변화하는 관계, 특히 그들의 미래 전망에 대해 살펴보려 했다. 고고학은 이론적 재형성과 기발한 유형, 새로운 자료의 정렬에 있어서 모든 사회과학 학문 중 가장 빨리 움직이는 학문이 되었다. Albright가 예언한 ‘고고학적 혁명’은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것처럼 끝나지 않았다. 이제 겨우 시작되었다.

그리고 신구약 시대의 고대 팔레스틴 역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충족시키는 저작이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의 많은 미래의 성취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고고학이 할 수 없는 것은 아마도 어떤 의미에서 성서를 증명하는 것이다.-실제로 일어났던 ‘구속사’를 중심에 놓는 성서 기자들이 주장하는 사건들을 논증하는 것으로도, 더군다나 현대 혹은 고대이든 이들 사건들로부터 유래된 신학적 추론을 확인함으로써도 역사적 증거가 확인될 수 있고 종교적 믿음을 강화시킨다는 생각은 여기서는 모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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