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과 성서 고고학 개요
들어가는 말
본고는 고고학의 개념과 역사, 그리고 성서 고고학 또는 시로-팔레스틴 고고학의 연구에 대한 개요가 목적이다. 따라서 1장에서는 고고학과 성서 고고학에 대한 개론적인 정리를 하고 2장에서는 THE ANCHOR BIBLE DICTIONARY 1권 pp354-367에 실린 William G. Dever의 “Archaeology, Syro-Palestinian and Biblical”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요약하여 학문(discipline)으로써 고고학 분과의 발전과 1970년대 이후 고고학(its)의 이론적 입장 등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Ⅰ. 고고학, 성서 고고학
1. 고고학의 역사
고고학(Archaeology)이란 말은 두 개의 희랍어에서 온 것인데 “고대”라는 뜻을 가진 “알카이오스”(archaios)라는 말과 말씀, 사건, 기사, 강연 등의 뜻을 가진 “로고스”(logos)라는 두 개의 단어가 합성된 것이다. 고고학이란 “고대의 사건들에 대한 연구”이며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았었으나 발굴 작업을 통해 밝혀진 역사의 자료들을 연구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과거의 인류가 생활 행위에서 남긴 유적이나 유물을 발굴, 수집하여 인류의 역사ㆍ문화ㆍ생활 방법 등을 구명하는 학문이며, 광의의 역사학의 한 분야로서 발굴 조사를 통하여 인류가 남긴 물질적 자료, 즉 유적과 유물의 해석으로 인류의 과거 생활 및 문화의 변천을 밝히는 과학이다. 인류의 과거를 구명하는 실마리로는 유적ㆍ유물과, 문자로 쓴 문헌 사료(文獻 史料)로 대별할 수 있는데 전자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 고고학이고, 후자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 문헌 사학 즉 협의의 역사학이다. 따라서 고고학을 단순히 사료 수집을 위한 방법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며 고고학자는 동시에 역사가이어야 한다. 고고학은 문헌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선사 시대와 역사 시대를 설정하고, 거기에 맞추어 선사 고고학(先史考古學)과 역사 고고학(歷史考古學)으로 구분하고 있다. 대체로 문헌이 없는 시대는 고고학의 독무대이며, 문헌이 완비된 시대는 문헌 사학의 독무대이다.
고고학은 인문과학과 자연과학의 양 분야에 걸쳐 있으며, 그 주변에는 관련 과학이 매우 많다. 자연과학 계통으로는 자연인류학, 자연지리학, 암석학, 광물학, 야금학, 古생물학, 동물학, 식물학, 생태학, 물리학, 화학, 천문학, 기상학 등이 있으며, 인문과학 계통으로는 문화인류학, 민족학, 종교학, 예술학, 사회학, 경제학 등이 있다. 또 자연ㆍ인문 양 과학에 걸친 것으로는 선사학, 선사지리학, 농학, 환경학, 통계학 등이 있다. 이외에도 사진 촬영ㆍ실층, 도법(圖法)ㆍ복원(復元)ㆍ복제(複製)ㆍ탁본(拓本)ㆍ보존과학(保存科學) 등의 기술이나 석기제작법ㆍ토기제작법ㆍ금공(金工)ㆍ칠공(漆工)ㆍ방적(紡績)ㆍ도량형(度量衡), 나아가 박물관이나 문화재 보호법 등에 관한 지식도 필요하다. 즉 고고학은 이러한 학문을 산하에 거느린 하나의 거대과학이라고 할 수 있다.
유물과 유적을 통하여 고대를 탐구하려고 한 시도는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나부 나이드 왕(556-538B.C.)이 바빌로니아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샤마슈 신전(神殿)을 발굴하여 아카드 시대의 신전 자리를 발견한 것이 고고학 연구의 효시라 할 수 있다. 이후에도 간간이 고고학적인 발굴은 있었으나 근대적인 학술로 성장하지는 못했다. 유럽의 고물(古物)에 대한 관심은 16세기 후반부터 고조되기는 했으나 고고학이라고 할 만한 연구는 독일의 J. J. 빙켈만의 등장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연구가 광범위하고 왕성하게 진행된 것은 그리스ㆍ로마의 미술품을 중심으로 한 고고학이며, 이런 종류의 연구에 대해 독일의 C. G. 하이네는 고고학(arkhaiologia)이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했다. 19세기는 고고학에 있어 괄목할 만한 발전의 시기였고 20세기 들어 특히 제2차 세계대전 후부터 오늘에 이르는 동안 고고학의 연구 조사는 일대 약진을 이룩하였다. 많은 나라와 지역에서 대규모 발굴이 있었고, 경험이 축적되는 가운데 조사법과 보존법도 눈부신 진전을 이룩했다.
고고학의 연구는 연대 결정부터 시작되는 데 상대연대(相對年代)의 판정법에는 형식학적 방법(Pottery Typology)과 층위학적 방법(stratigraphy)이 있고, 절대연대의 판정의 방법에는 문헌을 연구하는 것과 탄소14법(카본 데이팅), 피션트랙법, 연륜연대법 발열분석법(Thermoluminescence), 분광분석법(Spectographicanalysis), 중성자 활동계산법(neutron activation)등이 있다.
2. 성서 고고학
성서 고고학(聖書考古學/Biblical Archaeology)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기술(記述)과 사실(史實)의 관련을 연구하는 고고학으로서 불교 고고학과 더불어 종교 고고학의 일부를 구성하며, 시간적으로는 성서학이 전승과 역사의 최초의 정합성(整合性)을 인정하는 B.C.2000년기부터 신약성서가 성립되어 끝날 때까지, 즉 청동기시대부터 로마 시대까지를 주로 다룬다. 성서 고고학 문헌 가운데 가장 중요한 책 중의 하나인 「Biblical Archaeology」(Philadelphia:Westminster,1962)의 저자인 라이트(G. E. Wright)는 “성서 고고학은 고고학 발굴 결과 얻어진, 성서를 이해하는데 직접 또는 간접으로 도움을 주는 모든 사실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하였고, 그 연구 범위에 대해서 올브라이트(William Foxwell Albright)는 “성서 고고학의 연구는 고대 근동 지역뿐만 아니라, 인도에서 스페인에 이르는 지역과 소련 남방으로부터 아라비아 남단에 이르는 지역까지 성서와 관련된 모든 지역을 포함한다”고 말한다. 즉 신약성서 시대에 대해서는 로마제국과 상당 부분 일치하는 지역이 관심의 대상이고 구약성서 시대에 대해서는 중심지가 동쪽으로 이동하여 메소포타미아 계곡과 페르샤(현대의 이란)까지 포함하는 지역인 것이다.
성서 고고학은 아마도 1799년 8월 나폴레옹이 애굽을 침략했을 때 발견된 로제타 바위(나일강 삼각주에 있는 부근 마을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의 발견에서부터 시작된 듯하다. 세 줄로(헬라어, 애굽의 상형문자, 후기 애굽의 필기문자의 세 줄)쓰여졌는데 진 프랑소와 샴폴리온에 의해 해독되었다. 나폴레옹이 애굽에서 고대 기록들을 발견하게 된 것은 이 나라에서 더 많은 발굴 작업을 벌이게 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과학적 고고학이 팔레스틴에 이르게 된 것은 1890년에 W. M. 플린더스 페트리가 텔 엘 헤시(Tell el-Hesi) 언덕을 그의 연구 방법인 “연속적 연대의 연구”를 위한 성층연구법에 따라 수행한 데서 시작되었다는 견해와 19세기 미국의 E. 로빈슨이 성서 속의 지명을 실지 조사한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페트리를 이어 다음 단계로 발전시킨 사람은 올브라이트(W. F. Albright)로 헤브론 서쪽인 텔 베이트 밀심(Mirsim)을 발굴하였는데(1926-1932), 세심한 방법들을 사용하여 팔레스틴의 그릇들의 발전 과정을 완벽하게 확립했다.(도표1.노광우121쪽) 성서 고고학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도 성서 고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올브라이트가 1930년대부터 사용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토기의 형식에 의해 연대를 측정하는 방법은 영국의 페트리가 텔 엘 헤시 발굴 때 도입하고 올브라이트에 의해 완성된 것이다. 그 외에도 라이스너와 피셔(C. S. Fisher)가 사마리아에서 새로운 발굴 기술로 발굴 작업(1931-1935)을 벌였으며, 1952년에는 케더린 케년(Kenyon)이 여리고와 그외의 지역에서 발굴 작업을 하였다.
성서 고고학(또는 팔레스틴 고고학)의 성립은 1920년부터 1940년 사이에 발전한 과학적 연구 방법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연구에는 예루살렘에 있는 미국동양학연구소(American School of Oriental Research)의 교수였던 피셔와 올브라이트의 공헌이 컸다. 올브라이트의 텔 베이트 미르심 보고서는 과거의 연구 방법에 나타나는 주관성을 배제하고, 다른 사람도 이를 연구하고 검토 비판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는 계기가 되었다. 올브라이트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팔레스틴의 고고학적 편년을 세운 것이다. 올브라이트는 미르심에서 발굴된 토기를 형식적이고 층위적인 발전 단계로 구분하면서 편년을 세웠다. 편년의 구분은 학자들에 따라 조금씩은 다른데 유적의 발굴 숫자가 증가되는 것과 연대 측정법의 발전 등으로 좀 더 정확한 편년이 설정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한상인 교수의 박사학위 논문에 정리된 3인의 편년을 표로 정리하여 보았다.(도표2.한상인2,252쪽)
올브라이트의 제자인 라이트는 스승의 고고학적 입장을 견지함과 아울러 고고학적 연구결과를 신학에 접못시키려 시도하였고, 이러한 그의 노력은 독일계 신학자들의 거센 반발과 함께 고고학적으로 증명된 성서의 기록만을 진실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역사에서의 계시”라는 중대한 문제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 결과 성서 고고학은 미국의 성서신학 운동과 더불어 1960년대부터 난항을 겪게 되었고 1970년대가 되면서 그 성격을 바꾸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올브라이트와 라이트에 의해 주장되었던 성서 고고학이라는 용어 대신 “팔레스틴 고고학” 또는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아울러 그 성격도 성서의 내용을 이해하고 변증하는 입장에서 고대 팔레스틴 지역의 문화 연구라는 일반 고고학적 입장으로 변모하였다. 그러나 학자들은 “성서 고고학”이란 용어의 사용에 대해 일치된 견해를 갖고 있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고고학의 방법이나 목적은 그것이 성서와 관련이 있건 없건 기본적으로 어디서나 동일하다는 입장에서 “성서 고고학”이 아니라 “팔레스틴 고고학” 또는 “고고학과 성서” 등의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점에 대해서 James I. Packer는 오늘날 과학자들이 성서와 관련된 일이라면 별로 흥미를 갖지 못하기 때문에 성서 고고학이라는 말이 별로 호감을 사지 못하는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팔레스틴 고고학은 성서 시대를 훨씬 뛰어넘는 시대와 성서의 주제를 벗어난 다양한 내용을 다룬다. 또한 팔레스틴 고고학은 비옥한 초생달 지역(fertile crescent)의 동쪽 부분인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서쪽 너머에 있는 이집트 문명을 연결해 주는 교량적 위치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문화적 변천을 연구한다. 팔레스틴 지역은 세계에서 가장 집중적으로 고고학적 조사가 이루어져 적어도 6,000개 이상의 유적이 확인 및 조사되었으나, 그 가운데 중요한 유적은 28곳에 지나지 않고 발굴된 곳은 20곳이 못되며 발굴 결과가 발표된 곳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기에 앞으로 팔레스틴 고고학이 계속 발전할 가능성이 있음을 말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