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5-06-13 15:49
[3] 고고학과 성서 고고학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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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32  

3. 미래의 모습(shape)

우리는 이미 비유를 사용해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이 최근에 그의 시대가 도래한 위엄 있는 부모의 아이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젊은 성인의(adult) 미래는 어떨 것인가? 그러나 우리는 질문에 전적으로 대답하기 위해 먼저 외적 환경, 즉 중동의 상황을 살펴보자.

3-1.외국 현장 작업

미국의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이(진지한 학문적 작업으로서, 원래 연구와 혁신된 가르침에 공헌하는)중동에서 가능한 틀(framework)에 의존하고 있음은 명백하다. 미국 고고학자들이 과거 중동의 모든 고고학 발전을 선도해 왔다면 오늘날 그들은 경직되어 있고 많은 나라로부터 배척까지 받고 있다. 단지 이스라엘, 요르단, 시프러스에서만 미국인의 발굴과 연구가 활발할 뿐이다. 그러나 세 국가들에서조차 미국의 역할은 그 분야를 주도하려는 그 국가들의 학자들에 비해 현저히 축소되고 있다. 이들 국가의 학자들은 강력한 우선권(발굴현장의 지속적인 접근과 선택, 국가적 규모의 작업에 대해 우선적으로 작업할 수 있는 자유, 정부 부처, 대학 박물관 같은 국가기관의 장기적인 지원, 다양한 연구 장려책, 거의 발표되지 않은 거대한 데이터베이스 그리고 종교 고고학을 통해 국가 의식과 정체성을 초래하는 점점 계몽되는 대중들, 수백의 안전하고 전문적인 지위 등)을 누리고 있다. 그 국가들의 학자들은 계속적으로 가장 훌륭한 외국의 방법을 채용하고 거기에 자신들의 것을 더함으로써 급격히 성장하며 부족한 기금과 인력은 외국(특히 미국)과의 합작 사업으로 충당하고 있다.

그러나 중동이 발전 지역이라는 사실에 의해 주어진 몇 가지 조건(급격한 현대화와 지역 전체의 경제 성장, 폭력적인 반미 감정과 함께 종교적 열광주의와 함께 결합된 이 지역의 국가주의와 극단주의의 태동)이 앞으로의 전망을 어둡게 하고 있다. 더욱 더 불길한 것은 고고학의 몇 가지 극단적인 요소에 대한 노골적인 반대이다. 일부 아랍에서의 이슬람 형제애와 이스라엘의 초정통주의는 현장에서 고고학자를 애먹이고 기념물을 파괴하고 발굴을 금지하도록 공작한다.

미래에 미국의 역할은 어떻게 될 것인가? 우선권이 우리로부터 토착의 국가주의 학자들에게로 넘어가더라도 우리가 해야 할 일 몇 가지가 남아 있다. 첫째, 미국 고고학자들은 엄격한 정치적 중립의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 우리는 ‘비이익적 학자’로 남아 있는 것이 최선이다. 둘째, 경쟁이 아니라 협력이 우리의 키워드가 되어야 한다. 그 국가의 학자들의 노력을 되풀이하기보다는 보완적인 연구를 발전시켜야 한다(특별히 그들이 관심을 갖지 않거나 소홀히 대하는 유적, 시기, 문제에). 셋째, 비문자적 프로젝트를 시도하는 것이다. 넷째, 이스라엘과 요르단에서 보여지는 협력과 연합 계획에 좀 더 참여하는 것이다.

3-2.고국에서의 학문(The Discipline at Home)

a.몇 가지 실제적인 고려들

우리가 과거 20년 혹은 풋내기 학문으로서 그것을 확립시키기 위해 애를 썼던 그 분야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즉 성서적 고고학이 미국에서 누려 왔던 상당한 대중적 지원을 유지하고 획득하려면,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은 전문적이고 학문적인 위상으로 마지막 변형을 성공적으로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첫째, 현장 작업의 전업(full-time)전문가들의 연구와 가르침을 위한 직업을 제공하기 위해 파트타임 직업을 고용(유지)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 둘째, 우리 연구의 기본 형태인 현장 작업과 출판을 위한 기금을 필요로 한다. 셋째, 더 긴급한 것은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이 참된 학문적인 과목이 되기를 열망하느냐의 여부이다. 넷째, 꼭 필요한 것은 우리 모두의 필요, 학습된 단체들의 강화와 전문적인 조직들을 만드는 것이다. 우선, 1900년 이래로 성서학의 많은 측면과 함께 고대 근동 언어학, 역사, 고고학 분야에서 봉사해 온 동양연구미국연구소(ASOR)가 이제 아주 중대한 다른 영역에서, 즉 더 넓은 차원에서 고고학의 장려와 미국 대중교육에서 성공적이지 못했음을 반성하고, 미국만이 광범위한 대중적 공감과 지원과 함께 수행할 수 있는 새롭고 전문적이고 학문적인 견해를 창조해야 한다. 우리가 연구 기관으로 사상의 혼돈에서 살아남으려면 우리는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과 성서 고고학의 주류를 필요로 한다. 우리의 모토는 ‘수도원 밖으로, 학문 속으로, 그리고 심지어 시장에서조차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b.이론적 고려들

성서 고고학과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은 항상 이론과 방법의 중요성을 각성하는데 불충분했었다. 그래서 1970년대 이전엔 미국 고고학자들의 풍부하고 생생한 문헌과 비교되어, 놀랍게도 우리 분야의 이론과 방법에 대한 도서 목록이 실제로 없으며 지금도 비평적 토론도 거의 없다.

연구를 위해 선택되어진 질문들이 필연적으로 조사 양식을 형성한다는 의미에서 ‘방법이 이론이다’라는 사실이 분명히 간과되어졌다. 그래서 우리의 고발은 이론적 틀이 부족한 성서 고고학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가정들(⑴고고학이 아니라 성서 역사와 신학에서 이슈를 끌어낸다. ⑵거의 명확하지 않으며 더구나 비평적으로 발전한 것도 아닌 가정)이다.

우리는 해석적인 이슈가 거부되어야 한다고 제안하지 않는다. 반대로 성서 고고학과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의 거의 모든 발견에 대한 해석이 많은 지성들 사이에서 이들 과목을 특징지어 온 생생하고 격렬한 논쟁으로 끝없이 논의되어져 왔다. 그러나 가장 해결되지 않는 논쟁은 대체로 학문이 참된 고고학적 인식론을 개발하지 않았던 데 기인한다. 즉 기본적인 해석 방법에 대한 공감대가 없었다. ‘역사적 고고학’조차도 이 접근 방법엔 불충분했다. 증거는 선택적으로 수집되어졌고 결론은 끄집어내어지고 논쟁되었다. 또 해석은 발전했다(역사를 언급하는 모든 기초에 대해). 그러나 역사라는 것과 현대 사료 편찬 방법은 거의 질문되지 않는 물음인 고고학적 데이터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역사가 의미하는 것을 거의 명기하지 못했다. 그리고 고고학은 최소한의 정의도 내리지 못했다. 적절한 고고학적 인식론은 다른 것들 사이에서 이것들 같이 명백한 질문들에 직면할 것이다(자연적이고, 문화적인, 유적 형성 과정의 본성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상황은 고고학적 발견의 해석에 영향을 미치는가? 고고학적 자료들은 무엇으로 구성되는가? 고고학적 사유에 있어서 유비(analogy)의 역할은 무엇인가? 독특한 고고학적 논리는 있는가? 우리는 문화 유물로부터의 반응(behavior)을 어떻게 추정할 수 있나? 무엇이 문화와 문화 변화를 결정하는가? 등). 인식론은 효과적으로 우리가 얻은 자료의 질을 결정한다. 유물들은, 그것들이 상황(context)속에서 적절히 발굴되어지고 적절한 질문과 연관되어 해석되어질 때, 그리고 출판되어질 때에야 자료(data)가 될 수 있다. 고고학은 엄격하게 조직적이고 축적된 이론을 세우고, 이론을 시험함으로써만 인간적이거나 과학적인 학습의 분과로서 발전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인식론으로 의미하는 것이다.

우수한 이스라엘 역사가와 고고학자 베냐민 마자르에 의해 쓰려진 팔레스틴의 중기 청동기 시대에 대한 초기 논문은 이제 아주 고전으로 간주된다. 그것은 우리가 정치적 역사로 구분되었던 것에 대해 거의 모든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자들의 지향점으로 주어졌다. 그러나 이 논문에서는 우리가 오늘날 본질적인 것으로 연구하는 것, 즉 정주 형태, 기술, 사회, 경제적 역사와 인구 통계학에 관련된 언급은 없다. 미학적이고 종교적인 것도 소홀히 다루어졌다. 문화라는 용어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Kenyon에 의해 쓰여진 유명한 CAH에서도 중기 청동기 시대 연구는 강조점이 별로 다르지 않다.

이제 Kenyon과 Mazar는, 이들 이슈가 1960년대에는 제기되지 않았기 때문에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고고학자와 역사학자가 잘못된 질문을 물어 왔기 때문에 혹은 아주 유용한 자료의 전체 범위에 대해 집중할 수 있는 명확한 연구 계획을 장려하기 위해 부적절한 질문들을 누적시켜 왔기 때문에 그 자료는 쓸모가 없다.

wheeler-kenyon의 층위학 방법은 정확한 위치를 분리할 만큼 경험적으로 지표층(soil layers)의 관찰, 기록에 기계적으로 집중했다. 팔레스틴의 평범한 도자기는 도자기 연대를 꽤 정확하게 집어내도록 하는 도자기의 유형화 된 발전 단계를 챠트화 할만큼 거의 분석되고(장식과 모양이) 분류되어졌다. 그러나 극히 작은 예를 제외하고서는 도자기는 우리의 역사, 기술, 미학, 국제 관계, 무역, 즉 문화와 문화 변화에 대한 지식에 공헌한다는 관점으로 연구되진 않았다. 결국 그것은 불충분한 문화 변화 자체의 모델들이다. 문화라는 용어는 ‘도자기 집합’이란 말과 항상 마찬가지 의미이다. 주요 민족운동과 외국 침입은(즉 역사적 사건) 고대 팔레스틴의 거의 모든 변화를 설명하는데 이용되어졌다. 토착적인 사회 경제적 요인들, 기술적 혁신, 혹은 다른 의미로 일반적인 지역 문화의 발전에 대해서는 거의 강조되지 않았다.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은 층위학과 도자기 연대측정학의 숙달에 의해서 혹은 완벽한 현장 기술에 의해서는 그리 많이 발전하지는 못할 것이다. 오히려 그것의 인식론이 좀 더 정교해짐으로써 발전할 것이다.

미래에 ‘정치적 역사’의 대체 모델은 거대한 문헌 자료를 이용하여 이데올로기 밑으로 거대한 우연적인 대중적 사건을 넘어 거대한 시간의 휘두름을 넘어, 셀 수 없는 개인들의 일상 생활과 환경을 추구하는 사회, 경제적 역사를 쓰는 아날(annales)학파로부터 유래되어야만 할 것이다.

물론 고고학은 아날학파의 역사가에 의해 바뀔 수 있는 광범위 한 문헌을 포함하지 않는다. 또 그것이 잘 가공된 개인적인 역사로 써서도 안된다. 그러나 오늘날의 고고학은 생태학적이고 환경(setting)에 집중한다. 그리고 그것은 오랜 기간에 걸친 문화적 변화에 대한 민감함 때문에 모든 학문 사이에서 독특하다.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의 초점의 범위를 우리가 넓히는데 성공하는 것만으로는 고고학 일반 분야와 인류학을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과 통합시키는 목표는 아직 성취되지 않을 것이다.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중추적인 지정학적 상황, 위대한 문명 발상지, 급격히 성장하는 데이터 베이스와 함께 중동의 다른 어떤 나라들보다 그 지역에 훨씬 강하게 연관된 고고학적 연구의 오랜 역사, 성서의 땅으로서 엄청난 대중적 호소력(appeal) 등의 매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인류학자와 사회역사학자들은 사례 연구로서, 특히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잘 알려지지 않은 시리아와 비교하는 사례 연구로서만 전형적으로 팔레스틴을 무시하는 교차-문화적 비교를 추구하고 있다. 왜 그럴까? 소홀한 부분은 단순히 많은 인류학자들 사이에서 반성서적 경향을 지닌 세속주의자가 원인이다. 그 부분의 일부는 불행하게도 우리 자료의 질에 대한 의심이다. 그것의 많은 부분은 최근의 더 나은 작업을 소홀히 한 것처럼 과거의 불충분한 발굴에 기인한다. 그들은 주요 잡지를 읽거나 출판하지 않았고 전문가 모임이나, 다른 고고학적 인류학적 조직의 연례 회의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근동 선사 고고학과 마찬가지로 신세계와 유럽 고고학이 수행해 왔던 대학 인류학과의 프로그램을 가르치거나 나누지도 않았다.

세계 고고학의 최근-현재의 이슈는 다음과 같다. ⑴복합적인 사회의 흥망성쇠 ⑵문화적 변화의 재구성에 있어서 이상주의자와 물질주의자의 패러다임에 있어서의 균형 ⑶고고학/인류학의 사회학적 역사 ⑷공간-시간 체계론, 인공물의 다양성, 문화적 유형, 행위의 구체적인 상호 관련 ⑸유적 형성 과정과 고고학적 기록의 성질 ⑹민족성에 있어서 고고학적 정체성. 덧붙이자면 신고고학의 몇 가지 이론적 공격은, 정착 유형, 생활 양식, 사회 구조, 인구 성장 같은 특정 질문들을 반성하게 한다. 시리아-팔레스틴의 냉정한(공평한) 조사 방법이나 일반적 고고학과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의 문학에서의 비교 인용 분석은 우리가 이를 핵심 이슈의 토론에 아무런 공헌도 하지 못했다는 것과 이제야 그것을 깨닫기 시작했음을 보여줄 것이다. 소장 고고학자들은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을 주류로 만드는 과업에 참여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적 결과를 산출하기 위한 새로운 지향점을 발생시킬 것이다.

3-3.대화로서의 새로운 성서 고고학을 향하여

새로운 성서 고고학이 출현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두 학문 사이의 새롭고 실속 있는 대화의 가능성을 강조해야 한다. 신고고학과 현대 성서학 사이의 새로워진 대화가 이루어질 만한 성숙한 때가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새로운 세속적 고고학은 옛 고고학보다 ‘대화’에 공헌하는데 더 적합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의 가정에 있어서 보다 더 전문적이고 보다 개방적이고 보다 유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고고학 연구에서 적절하게 한 것이 거의 없는 특정 경향의 신학적 관점에 덜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a.텍스트의 유적(remains)들과 그것들의 공헌

고고학은 고대 이스라엘의 족장 시대나 정복 시대를 회복시키는 것만큼이나 역사적 예수를 재발견하려는 과업을 더 이상 직접적으로 도울 수 없다. 역사가로서 우리는 성서가 ‘무엇이 발생했나’를 묻지 않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했는가?’를 묻는다는 사실에 의해 궁극적으로 한정되어져야 한다. 다른 형태로 지적하자면, 고고학은 작지만 의미 있는 방법으로 도와야 한다. 더욱이 해석의 문제를 고려함에 있어서 텍스트는 많은 말을 하지만 유적은 침묵한다는 평범한 언급을 남겨 놓아야 한다.

b.인공적 유적들과 그것들의 공헌

보호되어지고 있는 고대 팔레스틴 자료의 대부분은 텍스트가 아니라 인공적인 가공물들이다. 그러한 자료들은 종종 불성실하게 보호되고 어떤 경우에는 고고학적 기록으로 남아 있어야 할 것들이 불규칙하게 표시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의미를 제공하는데 필수적인 맥락은 사라져 버리고 잘못된 발굴로 인해 잘못 이해되기도 한다. 안타까운 이들 물질적 유적(과거의 흔적)으로부터 우리가 배울 수 있는, 텍스트 연구를 보완, 보충하는 역사와 문화는 무엇인가?

간단히 요약하자면 첫째, 고고학은 성서가 출현하는 맥락, 없으면 완전한 이해가 불가능한 물질적, 문화적 맥락의 지식에 공헌해야 한다. 둘째로, 그것은 역사적, 신학적 사건에 대한 궁극적인 설명을 할 수 없지만, 고고학은 적어도 우리가 ‘변화의 생태학’이라고 부르는 것을 제공해 준다.

여호수아서와 신명기 역사가의 작품은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의 등장을 여호수아의 기적적인 선물로, 여호수아의 영도 아래 12부족의 급작스럽고 통일된 군사 정복의 결과로 묘사한다. 그러나 고고학적 증거들은 B.C.1200년전 후기 청동기 시대 팔레스틴의 가나안 유적들이 파괴되지 않았다는 의심을 보여 준다. 그리고 초기 이스라엘 정착지로 밝혀진 거의 모든 곳이 평화롭게 더럽혀지지 않았다는 땅에서 설립되었음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세속적인 역사가의 관점에서 이스라엘의 정복은 부분적으로 점진적이었으며, 후기 청동기 제1철기 시대의 지평에서 사회경제적 변화의 아주 복잡한 과정이지 기적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고고학은 동전의 다른 면을 보여 준다. 예를 들어, 히브리 성서에 반영되어진 표준적인 이스라엘 종교는 아마도 야웨주의적이지만 고고학은 민족 종교가 아주 혼합 종교였으며 가나안 풍요 다산 종교에 고대 이스라엘 종교 제의가 강하게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 준다.

4. 2장 결론

이 논문에서 우리는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과 성서 고고학의 역사, 그들의 변화하는 관계, 특히 그들의 미래 전망에 대해 살펴보았다. 고고학은 이론적 재형성과 기발한 유형, 새로운 자료의 정렬에 있어서 모든 사회과학 학문 중 가장 빨리 움직이는 학문이 되었다. Albright가 예언한 ‘고고학적 혁명’은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것처럼 끝나지 않았다. 이제 겨우 시작되었다.

그리고 신구약 시대의 고대 팔레스틴 역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충족시키는 저작이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의 많은 미래의 성취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고고학이 할 수 없는 것은 아마도 어떤 의미에서 성서를 증명하는 것이다(실제로 일어났던 ‘구속사’를 중심에 놓는 성서 기자들이 주장하는 사건들을 논증하는 것으로도). 더군다나 현대 혹은 고대이든 이들 사건들로부터 유래된 신학적 추론을 확인함으로써도 역사적 증거가 확인될 수 있고 종교적 믿음을 강화시킨다는 생각은 여기서는 모순이다.

나오는 말

1장에서는 일반 고고학의 개념과 역사 그리고 성서 고고학의 태동 과정을, 2장에서는 Dever의 논문 요약을 통해 고고학에 대한 개략적인 정리를 하였다.

고고학을 통해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현장의 바른 보전과 각종 기술이 발달해야 하고, 또한 엄청난 비용과 시간이 요구되기 때문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또한 성서 고고학에 대한 일반학자들의 오해와 편견에 따라 기독교의 지원이나 참여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고고학의 가치와 제한성이다.

고고학이 우리에게 과거 성서 시대의 사안을 알게 해 준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지만, 성서가 진리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일정한 제한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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