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성경고고학은 지금으로부터 약150년 전부터 시작되었는데 이 세계의 역사에 대한 조사연구와 함께 최초의 문화들이 융성하였던 지역 즉, 나일강 유역과 유브라테스, 티그리스강 유역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유역에 있는 가시적 폐허들이 답사되었고 수많은 도성, 무덤, 기념비, 성당, 궁전등 여러세기동안 흙과 모래 혹은 동굴 등에 감추어져있던 것들이 하나하나 발굴되기 시작했다. 이때 고대인들이 사용하였으나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잊혀졌던 알 수 없는 문자들이 판독되었고 오랫동안 망각되었던 언어들이 회복되어졌다. 이 위대한 발굴 및 표면 답사는 여러 나라에 속한 고고학자들의 경쟁 속에서 진행 되어왔다. 그 결과 고대문화 중에서 가장 눈부신 발견들이 이루어진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헷, 시리아, 아라비아, 루비아 등과 성경과 관련되어진 가장 중요한 팔레스틴까지 진행되어 놀랄만한 발견들을 할 수 있었다.
오늘 우리는 귀중한 고고학적 발굴들 중에서 성경연구에 귀중하다고 생각되는 몇 개의 발굴과정과 발굴장소, 내용등 성경과의 관련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몸 말
1.나그 하마디 문서
1945년 12월 어느 토인에 의해 발견된 고대 사본 집으로 나그 하마디라는 현대 도시 부근에서 발견되었기에 그 도시 이름을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사본들은 그 지역 농부에 의해서 ‘하모라 돔’이란 마을 근처의 나그 하마디라는 도시로부터 북동으로 약 10㎞ 지점에 있는 게벨 엣 타리프(Gebel et-Tarif)라는 절벽 아랫면에 있는 수많은 동굴이나 무덤들 중의 하나에서 발견되었다. 그 표지들의 파피루스 판지에 있는 많은 언급들로 보아 그 당시 수도원 생활의 초기 중심지였던 케노보스키온(Chenoboskion) 주위 지역에서 발생된 것임을 암시해 주는데 아마 그 사본들은 중간 상인들에게 팔렸을 것이고 결국은 골동품상에 넘어갔을 것이다.
1) 출판의 역사
융사본 혹은 사본Ⅰ을 벨기에의 고고물 상인 아잇이 애굽에서 산것에서부터 역사가 시작되어 1972년부터 1977까지 10권의 사본 출판이 이루어졌다. 또한 그것의 자매편 출판이 1978년에 이루어졌으며 1977년 둘째 계획이 완수되어 이것이 지금 우리가 말한 “나그 하마디 문서(The Nag Hammadi Library)”인 것으로 52개의 소책자(Tractates)로 구성되어 있다. 이 문서의 수집에 대해선 후 400년경으로 보지만 여러 가지 의견들이 있다. 그중 정통주의 수사들이 자기들의 입장을 변증하는데 사용하려고 이단자들의 문서를 필기하여 수집한 것이라는 의견을 가장 옳은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 문서의 내용은 “영지주의적”이라고 하지만 전체를 볼 때 교리적 통일성이 전혀 없다. 또한 이문서는 여러 종교 사상과 비슷한 개념을 혼합하고 있다. 여기에서 나그 하마디 문서가 제기하는 몇 가지 문제점들을 언급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점들은 기독교 전통의 형성에 있어 영지주의의 역할에 관한 계속되어진 논쟁들을 야기시켰으며 「영지주의적
문제」그 자체를 야기시켰다는 의미에서 볼 때 중요한 문제들을 안고 있다.
2) 기독교적 기원과 비기독교적 기원
영지주의가 하나의 기독교적 이단으로 이해되는 것이 적당한가 아니면 초기 기독교와 대면했을 때 중대한 영향을 끼쳤던 비기독교적 종교로써 이해되는 것이 적당한가에 대해 논쟁이 되어 왔는데 이를 야기시킨 것이 바로 나그 하마디 문서이다. 이 수집 물이 기독교적 기원과 기독교적 요소를 지니지 않는 몇 개의 작품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축복 받은 유그노스토스, 아담 묵시서, 셈의 석의, 알로게네스서와 같은 그러한 소책자들이 중요한 것들이다. 신약성서의 그리스도에 의해서 시사 받지 않은 영지주의적 구원자와 함께 완전히 발전된 영지주의적 신화를 제시하고 있다. 수집물중에 중요시되어진 축복 받은 유그노스토스 라는 작품은 비기독교적 영지주의에서 기독교적 영지주의에로의 이행이 입증될 만한 문서지만 명백한 기독교적 영향이 전혀 없다. 나그 하마디 문서가 영지주의의 비기독교적 기원을 단호하게 입증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고전적인 입장에 커다란 가능성을 더해 주고 있다.
3) 유대교적 자료들
영지주의 학자들이 문헌 안에 영지주의 기원 신화의 기초로 상당히 많은 양의 창세기 이야기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많은 해석자들은 영지주의의 형성에 있어서 유대교 자체 역할을 강조하는 유대교의 전통의 요소들을 나그 하마디 기록들에서 특히 셋파 유형의 문서들에서 발견하였다. 하지만 모든 영지주의의 체계에 있어서 기본이 되는 반 우주적 이원론 자체는 유대교적 전통으로부터 추론되었다고 생각할 만한 뚜렷한 근거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지주의의 기원들이 가지는 혼합주의적인 과정 속에서 보면 나그 하마디 총서는 우리가 이전에 알았던 것보다도 훨씬 더 두드러진 유대교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4) 영지주의와 신약성서
나그 하마디 총서가 종교사에 끼친 가장 중요한 공헌은 영지주의 현상 자체의 본성과 다양성을 밝혀준 사실이다. 영지주의는 원래 그 기원에 있어서 비기독교 적이라는 견해를 강하게 강화함으로써 간접적으로 그 문제에 빛을 비추어 준다. 영지주의가 연대기적 의미에 있어서 기독교 이전인지 아닌지는 나그 하마디 총서를 기초로 해서는 입증되지 않지만 영지주의는 적어도 초기 기독교와 동시대의 것으로 추측된다. 개개의 나그 하마디 소책자들은 여러 개의 보다 특수한 방법으로 신약성서 연구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도마 복음서의 경우에서 보면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5) 나그 하마디 문서의 중요성
① 경전의 형성: 주후 2세기는 정경역사에 획기적인 시대이다. 나그 하마디 사본들은 정경 형성의 한 과정의 무대를 나타내며, 또한 정경을 형성하는데 필요한 이유를 보여준다. 즉 그 외경의 형성과정에 차이가 있으나 정경과 외경의 특수한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고있다.
② 사본 비평: 나그 하마디 사본들은 기본적인 헬라어 사본에서부터 분리되어 나올 때에 차이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특별히 도마와 빌립의 복음 안에서 그 사실을 찾을 수 있다. 그노스틱 학자들은 여러 사본들을 함께 사용한 것을 보여주며, 또 오늘날 사본 연구에 참고가 되는 귀중한 자료들이라는 것이다.
③ 비판적 문제들: 성경 비평에 여러 가지 해결하지 못할 문제들이 있었으나 이 여
러 문제들이 이 사본들에서 해결된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를 대충 이 사본들에서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그 사본들 중에 나타난 것이 과장된 것과 허실이 있지만 사실도 부분적으로 나타나 있어서 그 빛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④ 신약의 해석과 신학: 이 나그 하마디 사본들을 조심스럽게 연구해 보면 신약 저자들이 사용한 “첫 아담”과 “마지막 아담”이라는 그 사상은 일찍이 있었던 지식에 근거한 것이며, 또 그노스틱 사상은 본질적으로 비기독교인 철학을 나타내지만 그들은 기독교의 술어를 도용한 것임을 보여준다.
⑤ 종교사: 연구가들은 이 사본으로 고대 지식 운동의 한 계통을 알 수 있다. 즉 그노스틱주의의 여러 분파들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만데안주의(Mandeanism), 마니키인주의(Manicheism)와 헬머티주(Hermetism)등이며, 또 그들이 다른 여러 운동들과 관계되었음을 보여준다. 그것들은 중세기를 거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속되고 있는 그노스틱 사상들과 동일하고 그들과 연관되었음이 타당함을 볼 수 있다.
2.에블라(Ebla) 원문
1) 텔마르딕과 에블라의 관계
1955년 한 농부가 시리아의 어느 모래바닥에서 현무암에 조각된 으르렁거리는 사자 형상 발굴과 동시에 제의(際儀)에 쓰인 잔을 발견했다. 이 잔은 행진하는 군병과 연회 장면으로 장식되어 있다. 고고학자 마티애는 이 제의 잔을 B.C 2000년대의 것으로 추정하고 이 발견된 위치를 텔 마르딕(Tell Mardikh)이라는 것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1968년에 “에블라”가 곧 텔 마르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텔 마르딕 발굴이 시작(1964)된지 4년만에 주전 2000년대에 속한 현무암을 발견하였다. 이 현무암의 형태는 설형 문자를 기록한 옷을 입은 인간상인데 이 사람은 ‘이빗림’왕의 상으로써 에블라잇
의 왕이었다. 그러므로 ‘마르딕’과 ‘에블라’가 같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2) ‘이블라’ 이름이 ‘에블라’로 변형과정
처음에는 학자들이 설형문자 표IB를 “이브(ib)”라고 발음하였기에 “이블라”라고 불리어졌는데 1936년에 ‘웅낫’(Artbur Vngnad)이 ‘보가즈코이’에서 발견한 후리안 원문에 “에블라”가 “에-엡-라-아-파(e-eb-la-a-pa)" 로 기록되어 ”에블라“로 칭해졌다.
3) 에블라의 시작과 끝
이태리 고고학 팀이 마티애 교수 지도하에 큰 기대를 걸고 연구를 계속한 결과 에블라의 연대를 세울 수 있게 되어 청동기 시대, 즉 주전 약 3000년대의 이곳 에블라에 농촌이 일어나고 도시가 구성되었다가 주전 1600년경 문화가 쇠망해진 것으로 추정하게 되었다.그리고 그들의 문화 쇠망은 헷족의 침략 때문이었다.
4) 에블라 토판 연구에 대한 두 가지 견해
①첫 번째 견해는 에블라 토판을 연구하며 연대 측정을 했던 시카고 대학교수이고 설형문자 언어학자중 가장 우수한 학자인 ‘겔브’는 에블라어는 메소포타미아어(오늘날 중동어)와 매우 가까운 것으로 특히 악키드어와 아모리어처럼 비슷한 말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므로 히브리어에서 매우 떨어진 언어라고 주장한다. 결과적으로 이 견해는 에블라문서 발견이 성서학 연구에 직접 관계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②두 번째 견해에서‘페티나토’교수는 에블라어가 초기 가나안어이고 북방 셈어에 매
우 가까운 말이며 히브리어에 매우 가깝다고 주장한다. 미국 예수회 학자인 다훗은 로마 성경연구소 교수인데 그는 페티나토와 같은 견해에서 좀더 나아가 에블라어는 직접적으로 히브리어에 연결된 언어이고, 우가릿(Ugarit)어보다 히브리어에 더 가깝게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5) 토판에서 볼수 있는 에블라 시대 배경
에블라 토판 발굴은 투툰카뭄의 무덤 발견(1922), 우가릿 발견(1929), 마리 문서 발견(1930), 쿰란 발견(1947)들 보다 더욱 중요한 발견이라고 볼 수 있다. 에블라 토판이 이미 문서상 알려진 도시 문명 중심지를 실제로 증거하기 때문이다. 이 도시에 상인들만 해도 삼만 여명이 모여서 장사했으며,농민,공무원,기술자들,학자들이 이 도시에서 고급 문화 생활을 하며 발전시킨 것이다. 또한 에블라 전체 인구는 삼십만 명이나 되었던 것으로 보며 이것은 고대 역사상 가장 많은 인구였다. 에블라가 가진 큰 창고는 548,500석이나 되는 보리 곡식을 보관했고, 이 곡식은 천 팔백 명에게 양식을 공급할 수 있는 큰 양이다. 에블라는 매매 행위에 농작물 대신 금전을 사용한 첫 도시이다. 즉, 인류 역사상 에블라가 처음으로 금전을 작물대신 사용한 것이다.
6) 에블라 토판과 구약성경과의 관련성
에블라 토판과 구약 성경과의 관계에 대한 학자들의 논쟁을 간단히 소개하면 그 이유는 성경 가운데 아담, 하와, 요나, 다윗등의 인명들이 에블라 토판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중에 특히 두 이름 아브라함과 에벨로 논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마티애 교수는 지금 에블라와 성경과의 관계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취하지만 에블라가 발견된 초기에는 “에브라임”, 즉 에블라의 황금시대 왕이 창세기 10장에 말한 아브라함의 조상(7대조)인 “에벨”과 관련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 적이 있다. 페티나토 교수는 매우 명백하게 아브라함이 북방 시리아의 본토인이라고 했다. 한 에블라 토판이 우르(Ur)는 하란(Haran) 근처에 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창세기 14장에 기록된 다섯 도시가 에블라 토판에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그후 이 견해를 조금 시정하여 세 도시인 소돔, 고모라, 소알(Zoar)을 확정할 수 있다고 했다. 예수회 신부인 다훗 교수는 페티나토 교수의 의견에 동의할 뿐 아니라 좀더 적극적으로 에블라 토판과 구약성경 관계가 밀접하다고 강조한다. 그는 창세기 14장에 기록된 도시들이 에블라와 주전 2500년경 매우 밀접한 경제관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다훗 교수는 지금 에블라를 발견하여 우리는 구약성경을 더욱 확실히 역사적 문서라고 취급할 수 있게 되었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7) 에블라 토판과 성경 언어와의 유사점(아담,하와,야발,노아)
①아담 : 에블라 토판에 에블라의 14명의 지방 통치자중 하나의 이름이 아-다-무(a-da-mu)로 나타났다.
②이브 : 에블라 토판이 “아-와(a-wa)"란 말을 표현한다. ”아-와“는 성경의 ”하와(hawah, Eve)"와 같은 것이다.
③야발 : 창세기 4장 20절에 말한 야발은 에블라 토판에 처음으로 고유명사인 “와-바-룸(a-ba-lum)"이 나타났다. 에블라어는 첫 발음인 와우(waw)를 지니고 있으나 히브리어에는 ”야(ya)“로 변한다.
④노아 : 에블라 토판에 이-나-후키(i-na-huki,안식의 섬)란 말이 기록되고 있다. 여기에 나-후(i-na-hu)가 “노아(noah, "repose")"로 되고 히브리어는 ”노아“가 된다.
결론적으로 위에서 보는바와 같이 에블라 토판이 구약성경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는 것을 충분히 증거 할 수 있다고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