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5-06-08 19:20
족장시대의 전쟁
인쇄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126  

족장시대
B.C 2000 - 1500년까지를 족장시대라고 하는데, 창세기에 보면 크게 세 부분 즉 아브람과 이삭, 야곱과 에서, 요셉과 그의 형제들의 이야기로 나뉘어져 족장 시대의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다. 족장들은 땅과 후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으며 그들이 전 인류를 위한 복의 통로가 될 것입을 확증받았다. 하나님은 족장들과 언약을 맺으셨는데, 아브라함과 는 두 번 언약을 맺으셨다(창15, 17장).

1. 롯이 사로잡혀가게 된 싯딤 골짜기 전투
◈ 성경 : 창세기 14 : 1 - 12
◈ 시기 : B.C 2115년경
◈ 장소 : 지금의 사해 남단
◈ 교전자 : 시날, 엘라살, 엘람, 고임의 북방왕 4동맹군 VS 소돔, 고모라, 아드마, 스보임, 소알의 다섯 연합군

아브람과 헤어진 롯은 좋은 땅을 골라서 사해 남단의 소돔에 정착하였다. 롯이 살고 있었던 소돔을 비롯한 다섯 성읍은 12년 동안 메소포타미아에 위치하고 있던 엘람 왕 그돌라오멜을 섬겼는데, 13년이 되던 해에 이를 배반해버렸다. 이에 격분한 그돌라오멜은 1년간의 회유기간을 두면서 동시에 이들 성읍들을 응징히기 위한 동맹군을 결성하였다. 14년이 되던 해에 그돌라오멜은 모든 준비를 갖추고 북방왕 4개국 군대로 물밀 듯이 가나안 땅으로의 진군을 시작하였다.

이들 북방왕 동맹군은 사해까지 내려오면서 아스드롯 가르나임에서 르바 족속을, 함에서 수스 족속을, 사웨 기랴다임에 서 엠 족속을 세일에서 호리 족속을 쳤다. 그리고 크게 돌아서 엘바란에 이르렀고, 다시 돌이켜 엔미스밧 곧 가데스에 이르러 아말렉 족속의 온 땅과 하사손다말에 사는 아모리 족속을 쳤다. 이에 크게 당황한 소돔을 비롯한 다섯 연합군은 싯딤 골짜기에 진을 치고 북방왕 군대를 맞으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소돔과 고모라 등 다섯 연합군대는 왜 패했는가? 자기 땅에서 싸울 수 있었기에 지형의 이점을 최대한 이용할 수 있었음 에도 패한 이유는 향락과 부패로 찌든 정신상태로 적을 맞았기 때문이다. 당시 소금 무역으로 돈을 번 이들 성읍들은 타락한 생활을 하였다.

지구상의 수 많은 전쟁을 분석해보면 외세의 침략보다도 내부적 원인에 의하여, 정치 경제적 문제보다도 심각한 종교적 도덕적 부패에 의하여 나라가 붕괴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첫 전쟁 싯딤 골짜기 전투도 그 원인이 도덕적 종교적 타락이었음을 볼 때 이는 성경 전체에 나오는 전 전쟁의 근본원인을 대변해주고 있다.

싯딤 골짜기 전투는 구약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전쟁이라는데 의의가 있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난 후 약 9년이 지난 84 세 때의 일이다.

2. 롯을 구출하기 위한 아브람의 단 전투
◈ 성경 : 창세기 14 : 13 - 16
◈ 시기 : B.C 2115년경
◈ 장소 : 단, 호바
◈ 교전자 : 아브람과 318명 VS 북방왕 4동맹군

롯의 소식을 들은 아브람은 318명의 장정과 아모리인 약간 명의 지원군을 거느리고 단(Dan)에서 따라잡아 야간에 기습 공격을 하였고, 다메섹 좌편의 호바(Hobah)에까지 쫓아가서 조카 롯과 재물과 부녀자를 포함하여 끌려갔던 사람들을 전부 되찾아왔다. 특기할 만한 아브람의 공격방법은 318명을 나누어 밤에 공격을 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주공과 조공 을, 기만과 책략을, 집중과 분산을 잘 활용하였으며, 주간위주에서 과감히 야간 기습공격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318명으로 이런 승리를 거둔다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다.

아브람이 북방왕을 파하고 돌아올 때 소돔왕이 사웨 골짜기에서 영접하였고, 살렘(예루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 를 가지고 나와 아브람에게 축복했다. 아브람은 멜기세덱의 제사장직을 인정하고, 그의 축복에 응답하는 뜻으로 전쟁에 서 취한 전리품 가운데서 십분의 일을 주었다(창 14:20). 성경에 나타난 최초의 십일조 기록이다.

3. 이삭의 그랄 골짜기 우물 분쟁
◈ 성경 : 창 26 : 1 - 33
◈ 시기 : B.C 2010년경
◈ 장소 : 그랄 골짜기
◈ 교전자 : 이삭 VS 블레셋인, 그랄 목자

이삭은 자신이 살던 땅에 흉년이 들자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통치하는 그랄로 이주했다. 이 곳에서 3번에 걸쳐 우물로 인하여 분쟁이 있었다. 그랄 골짜기 분쟁은 전쟁 기록이라고는 할 수 없다.

4. 디나 강간사건으로 인한 세겜성 복수전
◈ 성경 : 창세기 34 : 1 - 31
◈ 시기 : B.C 1870년경
◈ 장소 : 가나안의 세겜성
◈ 교전자 : 야곱의 두 아들 시므온과 레위 VS 세겜성의 추장 세겜

야곱은 얍복 나루에서의 사건이후 에서와 극적인 화해를 하게 되었다.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집을 지었고, 또 다시 가나안 땅 세겜성에 이르러 그 성 앞에 장막을 쳤으며 그 장막 친 밭을 세겜의 아비 하몰의 아들들에게서 은 일백 개로 사고 거기에 단을 쌓았다. 야곱에게는 장차 열두 지파의 조상이 될 열두 명의 아들들과 딸 디나가 있었다.

디나가 세겜 땅에 있는 여자들을 구경하러 나갔다가 마침 히위 족속 중 하몰의 아들인 그 당 추장 세겜에게 강간을 당하게 되었다. 디나를 강간한 세겜은 디나를 사랑하게 되어 그 아비 하몰에게 디나를 정식으로 아내로 맞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이 소식을 들은 야곱과 그 아들들은 분노했지만 막강한 세겜 일족을 섣불리 상대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야곱 의 아들들이 꾀를 내어 세겜과 그 아비 하몰에게 "우리 딸을 너희에게 주어 한 민족이 되게 하려면 모든 남자들이 다 할례 를 받아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세겜 부자는 아무런 의심도 않고 성 안의 모든 남자들을 설득하여 할례를 행하도록 하였다. 거동이 불편한 때를 기다려 야곱의 두 아들 시므온과 레위가 각기 칼을 들고 성을 엄습하여 세겜과 하몰을 비롯한 모든 세겜성 남자들을 죽였고, 야곱의 다른 아들들은 시체가 널브러져 있는 성으로 들어가 노략질하였다.

야곱의 딸 디나가 강간당하게 된 근본 원인은 야곱 자신이 하나님께 맹세한 벧엘 서원(창 28 : 10-22)을 이행치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건 뒤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는 법이다. 각성한 야곱은 지체 없이 벧엘 귀환을 서둘렀고 집안의 개혁을 단행했다.



 
 

일반형 뉴스형 사진형 Total 3,780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3780 야고보서에서의 윤리의식 웹섬김이 06-13 24
3779 선교의 성서적 근거 웹섬김이 06-13 24
3778 [3] 성경 고고학 웹섬김이 06-13 26
3777 [2] 성경 고고학 웹섬김이 06-13 26
3776 [1] 성경 고고학 웹섬김이 06-13 23
3775 [4] 시리아-팔레스틴, 성서 고고학 웹섬김이 06-13 24
3774 [3] 시리아-팔레스틴, 성서 고고학 웹섬김이 06-13 26
3773 [2] 시리아-팔레스틴, 성서 고고학 웹섬김이 06-13 22
3772 [1]시리아-팔레스틴, 성서 고고학 웹섬김이 06-13 24
3771 [3] 고고학과 성서 고고학 개요 웹섬김이 06-13 23
3770 [2] 고고학과 성서 고고학 개요 웹섬김이 06-13 20
3769 [1] 고고학과 성서 고고학 개요 웹섬김이 06-13 23
3768 고고학과 구약성서 웹섬김이 06-13 24
3767 성경 역사의 시대적 구분 웹섬김이 06-11 75
3766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 교회 선교사 웹섬김이 06-11 73
3765 예수에 대한 예언과 그 성취 웹섬김이 06-11 66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