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5-06-07 10:24
세대주의 종말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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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131  

세대주의  천년설과 

세대주의 전 천년설은 선교에 큰 영향을 끼친다. 우리보다 먼저 복음을 받아들인 중국은 당대에 유행했던 세대주의 전 천년설의 영향을 받았고 이로 인해 백투예루살렘 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한국의 모 선교 단체와 젊은이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아직도 한국의 일부 선교 단체, 선교사들, 그리고 교회와 성도들은 세대주의 전 천년설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고 있다.

이필찬은 백투예루살렘 운동이 땅 끝에 이르는 복음 전도를 재림의 조건으로 간주하는 세대주의적 종말론과 신비 체험을 강조하는 모습은 신사도 운동과 연결 되어 있다고 말한다(이필찬 2014, 36-37).

그는 중국 교회의 백투예루살렘 운동이 성경적 근거가 매우 빈약하기에 그 사역의 왕성함과 상관없이 정당화될 수 없음에도 이 운동이 교회의 이슬람권 선교에 매우 지대한 열정을 불러 일으킨 것은 사실이라고 말한다(이필찬 2014,37).

그리고 이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한 복음이 그들이 ‘땅 끝’이라고 여기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에 무슬림이 있기에 그들을 지나 땅 끝에 이를 때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이필찬 2014, 37).

보쉬(Bosch) 역시 복음 전도를 재림의 조건으로 생각하던 백투예루살렘 운동을 했던 사람들의 생각을 가리켜 이런 생각은 세대주의 종말론자의 특징이며 이들의 영향력은 이 시대 복음주의 진영에도 건재하다고 설명한다.

세대주의 전 천년주의자는 우리가 할 일에 대하여 강조점을 둔다. 세대주의 전 천년설은 19세기 후반 이후 50년 동안 여러 명의 선교지도자들이 창설한 선교 조직에게 영향을 주었고 이들은 마태복음 24장 14절을 주요 “선교 본문”으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이 선교 과업의 성공적 완수에 달려 있는 것으로 이해하였기에 복음 전파는 “종말이 오기 전에 성취되어야 할 조건”으로 여겼고 이는 우리가 마치 주님의 재림을 앞당길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하였다. 전 천년주의자들은 복음 전도의 목표를 왕을 다시 오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이러한 확신은 여전히 이 시대의 복음주의 진영 안에도 건재하다(앞의 책, 502).

윌리엄 허치슨(William R. Hutchison)은 피어슨 선교사의 글을 통해 세대주의 전 천년설을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을 앞당길 수 있다는 생각 안에서 어떠한 계획을 하는지 보여주었다. 보쉬(Bosch) 역시 그의 글을 인용함으로서 세대주의 전천년설을 믿는 이들의 생각을 보여준다.

“피어슨(A.T.Pierson)은 천년 왕국을 도래시키는데 필요한 돈과 헌신된 복음 전도자의 수를 추산하기도 했다”(Hutchison. William R. 1987 ,164: 보쉬 2017, 502에서 재인용).

이러한 피어슨(Pierson)의 생각은 세대주의 전 천년주의자들이 주님의 재림을 앞당기기 위하여 가지는 큰 열정의 단면을 보여준다. 하지만 자신들의 헌신으로 주님의 재림을 앞당길 수 있는 생각은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하나님 스스로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인식을 약화시킬 수 있다.

세대주의  천년설이 한국 선교에 끼친 

세대주의 전 천년설이 한국 선교에 끼친 영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세대주의 전 천년설은 어둡고 힘든 일제 식민지와 한국 전쟁을 치르고 가난과 슬픔 가운데 있던 한국 교회와 성도들에게 큰 위로와 힘을 주었다. 내일의 운명을 알 수 없고 미래의 희망을 쉽게 발견할 수 없는 성도들은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위로를 얻었다.

박응규는 이와 같은 신앙의 특징은 위기 상황을 강한 종말론적 기대로 이겨나갈 수 있는 안목을 제공하였을 뿐 아니라, 전도나 개인 경건에 박차를 가하게 함으로 귀한 신앙적 유산을 남기는 일에 일조하였다고 말한다(박응규 1999,41)

한국 교회가 다른 무엇보다도 영혼 구원에 대한 진지한 열정을 가지게 된 것 역시 세대주의 전 천년설이 준 긍정적인 영향의 일부라고 말할 수 있다. 세대주의 종말론이 주는 영혼구원의 우선성, 임박한 종말론과 두려움, 그리고 이로 인한 이원론적인 태도는 선교를 준비하는 이들에게 내면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신앙을 형성하게 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세대에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고자 했던 SVM 운동에 참여했던 선교사들과 같은 마음으로 주님의 재림을 앞당기기 위하여 열정적인 기도와 함께 ‘선교’에 대한 지나친 열정을 불어넣는다. 선교가 삶의 최우선적인 가치가 되어, 선교에 대한 관심이 없는 교회와 선교에 대한 열정이 없는 대상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관점이 지나치게 되면 ‘선교’가 ‘미셔니즘(Missionism)’이 되어 선교와 선교 사역이 삶의 최우선 가치가 되는 위험한 선교를 꿈꾸고 위험한 선교 사역을 하게 된다. 한 단체가 이러한 입장을 가졌을 때에는 개인의 필요와 부르심을 존중하지 않고 전체주의적인 분위기 안에서 선교를 직간접적으로 강요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선교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는 지체들은 그 공동체 안에서 저급한 그리스도인으로 취급을 당하거나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기도 한다.

박응규는 전 천년설로 고착화되어 가는 종말론적 경향을 언급하면서 한국 교회는 1884년(잠복기) – 1910(발화기) – 1919년(개화기) – 1934년(고착기) – 1945년의 각 단계를 지나면서 전 천년설이 형성되어갔다고 말한다(박응규1999, 40).

이렇게 세대주의 전 천년설이 형성되어 가면서 한국 교회와 선교에 긍정적인 영향 외에 부정적으로 영향을 끼친 부분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첫째, 세대주의 전 천년설의 문자적 성경 해석이 준 부정적인 영향이다. 이필찬은 세대주의 전 천년설이 문자적인 해석으로 인한 부작용을 낳았다고 언급한다.

그 혼란의 중심에는 성경에 대한 문자적 해석과 연역적 성경 해석이 존재한다. 특별히 요한 계시록에 대한 문자적 해석은 묵시 문학이요 서신이며 예언으로서 요한계시록의 독특한 문학적 특징들을 무시하게 되고 결국에는 그 본문에 대한 왜곡을 가져오게 된다. 문자적 해석으로 접근할 때 요한계시록의 많은 본문들은 재림으로 보일 수 있다. …더 나아가 이스라엘의 회복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것도 이러한 예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연역적 성경 해석이란 어떤 전제를 정해 놓고 그 전제의 정당화를 위해 무수한 참고 구절을 문맥의 고려 없이 동원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재림이나 휴거라는 것을 전제하고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성경 구절을 제시한다. 이러한 성경 구절의 사용에는 문자적 해석에 근거한 경우가 매우 많이 존재한다. 요한계시록 해석에는 이러한 문자적 해석이 얼마나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가라는 것은 요한계시록의 문학적 장르가 상징적 표현을 많이 있는 묵시 문학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해진다.

이에 요한계시록의 문학적 장르의 특징에 걸 맞는 해석을 시도함으로써 본문의 의도를 회복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재림에 고착된 요한계시록 해석으로부터 벗어나 오늘날 한국교회를 향한 요한계시록의 메시지를 찾아내야 할 것이다(이필찬 2007,573).

이러한 문자적인 해석은 한국 다수의 교회와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모단체에 영향을 끼친 백투예루살렘 운동 안에도 나타난다. 이필찬은 이 운동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선지자와 그리스도의 초림의 때에 이루어지지 못한 구약의 약속들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성취될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한다(이필찬 2014, 439).

백투예루살렘 운동은 회교권 선교를 목표로 시작했던 중국 교회의 취지와는 다르게 메시아닉 쥬와 인터콥과 같은 단체들에 의하여 변질되어 다윗 시대 예루살렘의 영광을 문자 그대로 재현하려는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다. 메시아닉 쥬에 의한 백투예루살렘 운동은 …송만석 장로와 같은 그룹의 지지를 받으면서 진행되고 있다…백투예루살렘 운동의 요지는 간단한다. 구약의 이스라엘이 문자 그대로 회복될 것을 믿는 것이다.

예루살렘도 이전의 영광을 다시 찾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백투 예루살렘이다. 모든 것이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중심적이다. 모든 성경 해석이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으로 통한다. 이들은 구약에서 선지자들을 통한 종말적 약속들이 예수님의 지상 사역을 통해 온전히 이루어지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제 재림을 통해서 이러한 구약의 약속들이 온전히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그래서 그들에게 재림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의 반대 논리도 성립되는데, 이러한 약속들이 온전히 이루어지게 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재림을 앞당기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는 더욱 강력하게 한국 교회에 작동하여 예수님의 재림을 앞당기기 위하여 예루살렘의 회복 운동에 더욱 박차를 강하는 형국이다. 인터콥은 세계 선교를 통하여 예수님의 재림을 앞당기기 위하여 예루살렘 회복 운동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형국이다. 인터콥이 세계 선교(세계 선교는 이스라엘 선교로 귀착된다)가 예수님의 재림을 가능하게 한다고 주장한다면, 송만석 장로와 메시아닉 쥬와 같은 그룹은 이스라엘의 회복, 다시 말하면 예루살렘 회복이 예수님의 재림을 가능하게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예루살렘 없이는 예수님의 재림도 없다는 극단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적 입장과는 거리가 멀다…백투 예루살렘 운동의 해석자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통해 약속들의 성취를 보게 된다고 주장한다. 선지자들의 약속을 문자적으로 해석한 결과다. 또한 그들의 주장은 잘못 해석된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하기도 한다.

1948년에 혈통적 이스라엘의 독립에서 성취되었다고 보는 무화과 나무 비유가 대표적인 예다. 세속적 국가로서 이스라엘의 독립은 이제 영적인 회복을 남겨두고 있으며 예수님의 재림과 맞물려 발생한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의 재림을 그토록 갈망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이 그토록 간절한 것은 인정할 수 있으나, 그 재림에 대한 갈망의 동기가 올바른 성경 이해에 근거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동의할 수 없다(이필찬 2014, 438-439).

실제로 필자는 선교 동원가로서 선교사가 되기를 원하는 다수의 형제 자매들과 선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알게 된 것이 있다. 그것은 의외로 많은 선교사를 꿈꾸는 형제 자매들이 세대주의 종말론에 경도된 선교관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들 중 소수의 형제 자매들은 문자적 이스라엘의 회복이 주님의 다시 오시는 조건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선교를 꿈꾸며 준비하는 형제 자매들과 함께 성경을 읽고 선교에 대한 공부와 나눔을 통하여 우리는 아래의 몇 가지 진리를 깨닫고 재정립하는 시간을 가졌다.

첫째, 선교는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고 선교는 하나님의 자신의 것이기에 그 분이 이루어 가신다는 사실이다. 선교는 명령인 동시에 언약이기에 우리는 선교의 명령에 순종하는 동시에 하나님이 스스로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 자신의 선교에 영광스럽게 참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교적 관심은 일관되게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혈통적 이스라엘이 아니라, 온 열방과 땅 끝을 향하고 있다.

하나님은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하나의 샘플로 그리고 단순한 통로로 선택하여 온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구원의 경륜이 있음을 나누었다. 하나님은 구약의 혈통적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백성이 받는 복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이스라엘 모델’을 통해 보여주시는 동시에 그것을 보며 사모하게 된 열방을 초청하고자 했음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실패하는 듯하지만 사도 행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천하 각국으로부터 온 유대인들뿐 아니라(행2:5), 알렉산더 대왕이 지배했던 나라의 사람들, 즉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들,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행2:9-11)에게 성령님을 부으심으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온 열방의 온 족속에게 향하고 있음을 보여주셨다.

사도행전 2장 10절에서는 이들을 가리켜,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이라고 설명함으로써 혈통적 유대인과 새롭게 하나님의 가족으로 편입된 이방인들을 동일하게 신약의 이스라엘로 부르시고 하나님의 백성 삼으셨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스라엘을 신약의 교회가 아닌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십자가의 구속 사건을 극단적으로 제한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필찬은 세대주의 종말론에 경도된 이들이 혈통적 이스라엘 선교만을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선교라고 규정하여 많은 젊은이들을 이스라엘로 내몰아 그들의 인 생을 허비하게 만들었으며, 여러 단체들은 유대인들의 신앙과 상관없이 그들이 이스라엘로 돌아가 정착하는 일에 헌금을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다(이필찬 2014, 9).

이필찬의 말대로 잘못된 성경 해석은 하나님의 사람들과 재정을 허비하게 하고, 세대주의 종말론의 문자적인 성경 해석은 요한계시록에 나와 있는 성경의 의미를 혼란스럽게 할 뿐 아니라, 잘못된 해석이 낳은 왜곡된 선교를 낳게 하는 뿌리와 근간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대주의 종말론에 대한 면밀한 신학적 성찰을 필요로 한다.

둘째, 세대주의 종말론에서 지나친 재림에 대한 강조가 주는 부정적인 영향이다. 이필찬은 이와 같이 재림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배타적 내세주의를 가지게 하고, 이는 지상에서 변혁의 삶을 살아야 하는 공동체로서의 소명을 간과하게 하고 기독교를 세상으로부터 고립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말한다(이필찬 2014,8-9).

이러한 종말론은 세상에서 변혁의 존재로서의 부르심을 망각하게 하는 동시에 이 땅에서 허락된 삶에 대하여 이원론적인 태도를 지향하게 한다. 성경적인 현실주의가 아닌, 성경적 이상주의에 빠져 현실에 대한 감각이 없거나, 현실의 필요를 은근히 무시하는 영성을 자극하게 된다.

박응규 역시 세대주의 종말론의 경향이 개인적이고 타계적인 방향으로 치우칠 때에 성경적인 종말론의 한 부분이 상실되는 결과를 초래함으로써 종말론에 담긴 우주적 차원의 종말론이 소실되는 것을 지적하였다(박응규 1999,41). 박응규는 하나님의 관심은 단지 개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 우주를 향하고 있으며,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에 관한 가르침 역시 초월적이며 전 우주를 포함하는 차원을 가지고 있고 개인 구원과 사회의 전 영역과 이 세상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고 있음을 밝힌다(앞의 책, 41).

이제 이러한 세대주의적 종말론이 가지고 있는 배타적 내세주의가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진 세상을 향한 계명을 간과하게 하는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와 함께 세대주의 종말론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가지게 되는 세상에 대한 이원론적 태도가 어떻게 선교에 영향을 끼치는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스캇 선퀴스트(Scott Sunquist)는 1974년 세계 도처로부터 복음주의자들이 스위스 로잔에 모여 새로운 에큐메니칼 성격을 띤 복음주의 선교 운동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150개국 2,700명의 대표들은 “전 세계의 사람들로 그 분의 음성을 듣게 하라”는 주제를 가지고 선교를 위한 연합을 시도했다(Sunquist 2015, 320) 이 주제와 관련하여 복음주의권에서 다소 낯선 주제들이 표면으로 떠올랐는데, 그것은 중남미의 대표들이 강조한 사회적 책임에 관한 이슈였다. 이를 통하여 조금 더 포괄적이고 철저한 선교에 대한 이해를 가지게 되었다(위의 책, 320).

이러한 복음주의 운동의 흐름 안에서 일부 선교사들은 이전과 달리, 선교지민의 필요에 대하여 사회적 책임을 의식하고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는 동시에 예수님의 계명을 따라 그들에게 긍휼을 베푸는 사역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인식하는 변화가 생겼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로잔 대회의 결정처럼 전 인격적이고 보다 더 균형 있는 선교를 감당했다. 반면 일부 선교사들은 여전히 영혼 구원의 우선성 앞에서 계명을 따라 섬기는 긍휼 사역은 영혼구원을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렇다면 세대주의적 종말론을 믿고 따르는 선교사들은 일반적으로 어떤 입장을 지지할까? 이들은 복음 전도의 우선성을 지향하기에, 복음주의권에서 대두된 사명과 계명이 균형을 이룬 총체적인 사역과는 상관없이 선교지민의 실제적인 필요에 대한 사회적 책임 그리고 복음의 공공성에 대하여는 소홀할 수밖에 없는 경향을 지닌다.

세대주의 종말론은 세상을 악한 것으로 보고 교회 공동체를 이 세상으로부터 출애굽한 공동체로 간주한다. 이러한 관점은 하나님이 그토록 사랑하신 세상에 대하여 이원론적이고 배타주의적인 태도를 취하게 한다. 세대주의 종말론은 ‘천국’을 단지 죽어서 가는 공간적인 장소로 이해하기 때문에 성경과 주기도문에서 말 하는 ‘임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개념을 약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세대주의 종말론의 영향을 받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주권이 선포되지 않는 일상의 모든 영역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되어야 하는 필요를 간과하기가 쉽다. 하나님의 왕권 회복을 위하여 계명과 사명의 긴장을 유지하고 복음을 전하는 것 외에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사회적 책임과 순종에 대하여 균형 있는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선교사 또는 복음 전도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를 가지지 못할 때 복음을 듣고 회심한 이후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과 대안을 제시할 수 없게 된다.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 외에 장차 우리가 가게 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이원론적인 삶을 낳고 세상의 필요에 무관심한 성도를 양성할 수 있다.

달라스 윌라드(Dallas Willard)는 최고의 지상 명령(The Greatest Commission), 즉 선교의 목적인 제자 삼는 일, 즉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명령을 놓친 교회와 선교계를 향하여 일침을 가한다. 윌라드(Willard)는 ‘Commission’에서 ‘C’와 ‘M’을 떼어내어 ‘Omission’으로 바꾸는 워드 플레이를 통해 선교계가 하고 있는 최고의 실수가 무엇인지를 인상 깊게 드러냈다. 그래서 최고의 지상 명령(The Greatest Commission)을 최고의 누락(The Greatest Omission)으로 바꾼 선교계의 아픈 현실을 지적했다(Willad 2007, 13).

이를 통해 우리 교회의 가장 중요한 선교 명령인 제자도의 상실을 상기시킴으로써 교회와 선교계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가 주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제자 삼는 일’임을 기억하게 했다.

이 소고에서는 충분히 다룰 수 없지만 로잔 대회의 미전도 종족 운동 안에서 중요한 구절로 삼았고, 세대주의 종말론을 따르던 이들이 중요시했던 마태복음 24장 14절에 대한 해석 역시 왜곡된 부분이 있었음을 자세하게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말씀에 대한 잘못된 해석과 영향력은 우리의 선교를 계명과 사명 사이에서 균형 잡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성경이 가장 중요하게 말하고 있는 선교의 가치인 ‘제자 삼는 일’보다 서구의 실용주의적이고 과업 중심적인 그리고 경영적인 방식의 양적 선교를 과도하게 지향하게 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세대주의 종말론에 영향을 받은 선교는 성경에 입각한 건강한 선교를 지향하는데 장애가 되는 요인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선교는 취약한 신학적인 한계뿐 아니라, 실천적인 한계를 규정짓게 한다. 과거 선배들의 뜨거운 열정과 개척 정신은 영광스러운 선교 유산을 우리에게 남겨주었다. 단순하고 순결한 순종으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종족과 사람들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며 자신의 삶을 드린 선배 선교사들의 귀한 선교 사역과 하나님의 역사에 대하여 깊이 감사하는 것이 마땅한 우리의 반응이다. 이러한 감사와 함께 우리가 물려 받은 선교 유산 앞에서 이제 우리는 선교와 관련된 말씀에 대한 성경 신학적인 고찰과 우리의 선교에 대한 선교 신학적인 성찰이 절실하다.

1988년 이후 한국 교회는 선교의 기회에 동참하고 성장해 오면서 최근 수 년 사이에 교회의 정체기와 맞물려 선교의 정체기를 맞이했다. 이에 더하여 코비드-19는 우리의 선교 사역을 강제로 멈추게 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과거 우리의 선교와 선교 행위에 대한 성찰을 할 수 있는 천금 같은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시기에 세대주의 종말론이 우리의 선교에 직간접적으로 끼친 영향을 고찰하고 우리의 선교가 더욱 성경적인 기초 위에 세워지도록 재조정하는 것은 시대적인 요청이며 하나님의 요청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 결론에서는 세대주의 종말론의 부정적인 영향을 극복할 수 있는 바람직한 종말론의 방향을 논의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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