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7-08-25 16:26
[2]한국 개신교 이단의 발생과 교리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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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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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백문의 이스라엘 수도원

신비주의에 몰입, 수도원 세워

백남주를 스승으로… ‘어린양 혼인잔치’로 메시아 소동

 

 
 

 

 

김백문의 출생과 활동

 

초원(初園) 김백문(金百文)은 원산 예수교회를 설립한 백남주 밑에서 생활했던 인물이다. 김백문은 1940년대 스승 백남주의 곁을 떠나 독자노선의 길을 걸었다. 그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창립했고 ‘이스라엘 수도원(以生列 修道院)’을 이끌었다.

김백문은 1917년 10월 19일(양력) 경상북도 칠곡군 인동면 인의동 448번지(현재는 경북 구미시 인의동 488번지)에서 4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김백문(金百文)에 대한 학력은 정확하지 않다. 단지 일제 강점기 때 대구의 의전전문학교에 다니다 중퇴했다(3년)는 이야기만 있을 뿐이다. 김백문은 형 김이문이 함경북도 회령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을 때, 그곳에서 하숙을 하고 있던 경상도 출신 여성 김남조를 만난다. 당시 김백문의 나이는 만 17세가 되던 1934년이었다.


김백문과 백남주의 만남

김남조는 첫 만남에서 김백문의 비범함을 보고, 종교에 관심이 없었던 그를 설득하여 기독교 신앙의 길을 걷게 했다. 이때부터 김남조는 김백문의 ‘신앙의 어머니’ 역할을 하며, 회령 청진 주을 나남 등지의 신비주의 기도파들에게 김백문을 소개시켜 주었다. 결국 원산(元山) 신학산(神學山)의 백남주에게 소개해 그의 제자가 된 것이다.

김백문은 원산 신학산과 장좌동 성주교 생활을 통해 점점 신비주의에 몰입하였고, 1937년 즈음에 비몽사몽간에 “주님을 만나서 자신에 대한 사명과 미래에 일어날 역사와 기독교의 난해한 성서에 대해 가르쳐 주셨다”고 한다. 그리고 김백문은 성주교를 비롯해서 신비주의 집단들이 3년을 넘기지 못하고 사라지는 것을 보고 그 이유가 무엇인지 본격적으로 연구하여 시작했으며, 세 권의 저서 <성신신학> <기독교 근본원리> <신앙인격론>을 남기게 된다. 비슷한 시기에 김백문은 함경도 방면의 신비주의 모임에서 알게 된 곽할다(郭割多) 여인의 딸 조선애(趙善愛)와 혼례를 치렀다.


이스라엘 수도원의 탄생

일제시대 신사참배를 반대하던 평양신학교가 폐교되고, 1940년 4월 서울에 ‘조선신학원’이 강의소 형태로 개원했다. 김백문은 스승 백남주를 떠나 조선신학원에 입학을 하게 된다. 김백문은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혹독한 고문을 받았고, ‘신령회’ 사건으로 조선신학원의 교수 및 학생들과 함께 구속됐다. 후에 감옥에서 나온 김백문은 김헌(金憲)이라는 지인의 도움을 받아 경기도 파주군 파평면 섭절리(현재는 율곡리)에서 ‘야소교(耶蘇敎) 이스라엘 수도원’을 세운다.

1946년 3월 2일에 수도원에서 수도생들과 신도들이 특별기도회를 하고 있었는데, 기도회를 하던 중에 천지가 진동을 했다고 한다. 수년 동안 김백문이 집회를 가는 곳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수도원은 매년 3월 2일을 ‘개천(開天)의 날’로 기념하게 되었으며, <신조내의>(信條內意)라는 것을 발표했다.

수도원을 시작한 지 2개월 쯤 되었을 때 문용명이라는 20대 중반(25세)의 한 청년이 찾아왔다. 문용명은 후에 문선명으로 개명하는데, 그가 바로 통일교의 문선명이다.


김백문의 종말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김백문은 부산 동래로 피신했다. 이때 김백문은 <타락, 복귀원리>를 집필하고 있었는데, 문선명은 그 원고를 교정보겠다고 가지고 가서 6개월 이상 가져오지 않는 소동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김백문은 1953년 서울이 수복되자 제자들과 함께 서울로 돌아와서 ‘이스라엘 자녀 된 맹세’라는 것을 선포하고, ‘야소교(耶蘇敎) 이스라엘 수도원’ 간판을 걸게 된다. 그리고 12월 25일 제1기 수사인 김정애를 신부로 맞아 ‘어린 양(羊)의 혼인잔치’를 치렀다. 전처 조선애와는 1962년 4월 20일에 이혼을 하였다. ‘어린 양(羊)의 혼인잔치’는 스승 백남주가 원산 신학산에서 거행했던 ‘천국결혼 잔치’에서 원형을 찾을 수 있으며, 김백문 자신이 메시아임을 나타낸 것이다.

이리저리 옮겨 다니던 초원 김백문은 정릉 3동 산1번지(현재는 정릉 3동 769의 5번지)에 있는 김정옥의 집으로 예배처를 옮기고, 간판을 ‘기독교 청수교회’로 명명했다. 김백문은 1990년 12월 20일 오후 5시 경에 사망하였고, 경기도 파주군 탄현면 축현리에 있는 기독교인 공원묘지(묘번 3456번)에 묻혔다.

 

정득은의 삼각산 기도원

 

‘영체교환’ 주장, 문란한 성관계

박태선·문선명 등과 관계 맺어…결국 얻은 건 임질 매독

 

 
 
 
 

 

정득은의 출현

 

정득은은 1897년생으로 그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계기는 박태선 전도관이 <세계일보>에 폭로되면서 부터이다. 정득은은 1929년 33세의 나이로 남편과 이혼을 한 후에 신앙적으로 타락했다가 43세 때에 다시 기독교로 돌아갔다고 알려지고 있다.

정득은은 1945년 광복 당시 50세였으며 평양에서 ‘광해(廣海)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광해교회에서 정득은은 H씨 등을 사귀게 되었는데, 어느 날 H와 입을 맞추라고 하는 이상한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얼마 뒤 정득은은 H씨와 성관계를 가졌고, H씨는 박흥식의 장모에게서 먼저 ‘영체(靈體)를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정득은은 1946년 11월 경(음력) 월남하여 서울에 도착해 김백문의 집회에 참석도 하고 이스라엘 수도원까지 찾아가기도 하였다. 이스라엘 수도원 서울교회(상도동 소재)에서 방호동(方好童)의 모자를 알게 됐고, 이들의 후원을 받아 삼각산에 집회소를 마련하게 됐다. 이때부터 정득은에게 기도능력이 있다는 소문이 알려지게 됐고,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연희대학교 신학부 학생인 김○과 장로교인 이○○ 그리고 전도관을 세운 남대문교회 박태선 집사 부부 등이 전도되어 정득은을 추종했다.


계시와 피갈음

이 무렵 정득은은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서 방호동에게 그 내용을 받아쓰게 했다. 내용을 살펴보면, 성주교 김성도와 초원 김백문 그리고 통일교 문선명이 받았다고 하는 계시내용과 비슷한 점이 있다.

계시 내용은 ‘인류 최초의 죄는 천사장 루시퍼(루수벨)와 하와(해와)의 성관계를 통하여 발생했다. 창조 이래로 잃어버린 모든 것을 다시 찾는 복귀역사를 하나님이 하고 계신다. 생령의 사람, 영생할 수 있는 존재가 되면 에덴복귀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또한 정득은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구원에 있어서, 천사장 루시퍼로부터 인류가 더러운 죄의 피를 받게 되었으니 선악과를 다시 따먹어 새로운 피를 받아야 한다는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정득은은 하늘에서 택한 사람과의 영체교환(靈體交煥)을 통해 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박태선의 집에서 피갈음 행사를 약 1개월 동안 진행하였다.


정득은 그리고 박태선과 문선명

그러나 피갈음에 참여했던 장○○의 남편 백○○ 목사가 이 사실을 알게 되어 논란이 일어날 조짐이 나타났다. 그러자 박태선은 자신의 집에 있던 신도들을 분산 추방시켰다. 정득은과 신도들은 행사를 중단하고 삼각산 기도원으로 돌아갔다. 정득은은 6·25 동란이 일어나고 서울수복이 된 후에 서울 용산구 원효로 2가에서 ‘에덴유치원’을 설립하여, 전쟁고아를 돌보며 굶주리고 있던 인근 주민들에게 쌀을 배급하거나 죽을 쑤어 나눠주는 구호사업을 했다. 잠시 경기도 평택군 진위면 계시리에 있는 장로교회를 담임한 적도 있다.

1957년 2월 9일에 목사 백○○ 목사 부부는 정득은의 친딸이 인간 이하의 행동을 하고 다니는 어머니에 대해 한탄하며 제재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는 소리를 듣고, <세계일보> 김경래 기자를 통해 피갈음 사건을 폭로했다. 이로써 박태선과 정득은의 혼음사건 전말이 드러났다. 김경래 기자는 정득은을 직접 만나 당시 의학으로 손댈 수 없는 임질 매독에 걸린 것을 확인하였다.

박태선 외에 정득은과 성관계를 맺은 또 한 사람이 있다. 바로 통일교 문선명이다. 문선명은 서울의 영등포구 상도동에 거주하고 있을 때 김백문의 이스라엘 수도원에 심취해 있었다. 문선명은 1946년 6월 6일 공산주의로 물들고 있는 ‘북한으로 월북’하라는 계시를 받고 평양으로 갔는데, 그곳에서 같은 내용의 계시를 받은 정득은을 만났다. 그때 문선명은 26세이고 정득은의 나이는 40세였다.

정득은과 문선명은 대화를 하던 중에 ’평양을 제2의 예루살렘으로 만들라’는 계시에 서로 동의하고, 두 사람은 ‘소생 장생 완성’을 의미하는 ‘영체교환’의 행위를 3회에 걸쳐서 했다. 그리고 난 후 문선명은 죄가 없는 인간이 되었다고 선포를 한다. 그때부터 정득은과 문선명은 여성과 남성 10여 명을 전도해 ‘천사장 루시퍼가 하와를 유혹하여 성적타락을 일으킨 것’과 ‘예수의 모친이었던 마리아가 모자협조(성교)’를 하지 않아서 예수가 십자가에 죽게 되었다는 ‘창조, 타락, 복귀섭리’의 내용을 강의했다. 그리고 여자 신도들과 혈통복귀 의식을 치른다.

참고자료:최중현, <한국 메시아운동사 연구>, 박정화 외, <야록 통일교회사>



문선명과 통일교

핵심교리 훔치고 문란한 복귀의식

김백문·이용도 등에 영향 받아…며느리가 실체 폭로

 

 
 
 
 

 

문선명의 출현

 

통일교 창교주인 문선명은 본명이 문용명으로, 1920년 1월 6일(음력) 평북 정주군 덕인면 상사리 2221번지에서 아버지 문경유와 어머니 김경계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문선명 나이 15세 즈음에 온 가족이 기독교로 입교했다. 문선명은 1936년 4월 17일 초등학교 4학년 되던 해에 환상 중에 예수가 나타나서 ‘인류구원 사업의 소명이요, 공식하명(公式下命)’이라는 인류를 구원하는 메시야의 사명을 받았다고 한다.

서울로 상경한 문선명은 흑석동에서 경성상공실무학교 전기과에 입학을 하였다. 그러나 문선명은 학업보다는 이용도의 예수교회와 북아현동에 있는 오순절 교회에 출석하면서 신비주의에 심취하였다.


이단들과 만남

1943년 귀국한 후에 1945년 10월부터 약 6개월 간 경기도 파주군 임진면 섭절리에 있던 김백문의 이스라엘 수도원에 문하생으로 들어가 교육을 받는다. 그 후에 문선명은 월북하여 1946년 6월 6일 ‘문선명을 만나라’는 계시를 받은 정득은과 평양 사동에서 만나 ‘영체교환’의 행위를 한 후 문선명은 죄가 없는 인간이 되었다고 선포를 한다.

평양에 정착한 문선명은 정득은과 함께 10여 명 정도를 포교한 후에 “천사장 루시퍼(루시엘)가 하와(해와)를 유혹하고 성적으로 타락시켜 인류의 죄가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성적인 타락으로 부터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가 모친 마리아와 모자협조(성교)를 해야 하는데, 모친 마리아가 거부하므로 구원이 실패하여 결국 예수가 십자가에 죽게 된 것“이라는 창조원리 내용을 가르쳤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UN군에 의해 10월 14일에 흥남감옥에 있던 문선명은 석방이 된다. 그리고 1950년 12월 4일에 흥남형무소에서 만난 박정화 김원필과 함께 남쪽으로 피난을 하게 된다. 문선명은 부산 동래에서 피난하던 시절에 김백문을 찾아가 집필하던 <타락, 복귀원리> 원고를 교정해주겠다고 가져갔다. 통일교를 창립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한 박정화도 자신의 고백서인 <야록 통일교회사>에서 “통일교 핵심교리인 <창조, 타락, 복귀>는 문선명이 김백문의 논리를 그대로 도용했으며, 문선명의 부인 최선길이 가지고 다니다가 후에 유효원에 의해 정리되어 책으로 출간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복귀의식과 통일교

1953년 문선명은 부산에 기거하면서 포교활동을 계속한다. 문선명은 부산 수정동교회 시절에 ‘루시퍼(루시엘)가 하와(해와)를 유혹하여 동침했기 때문에 유부녀 여섯 명을 선택하여 성관계를 통한 복귀섭리 의식을 치르면, 사탄에게 더렵혀진 피를 깨끗이 한다’고 주장하면서 ‘신OO 오OO 이OO 김OO 강OO 정OO을 여섯 마리아로 선포’하고 성관계를 맺는다. 이 복귀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소생, 장생, 환생의 3회에 걸쳐 남녀가 동침하는 것을 말한다.

1954년 2월쯤에 문선명의 지시를 받아 박정화와 유효원은 서울에 올라와 성북구 북학동 391번지에 거처를 마련한다. 그리고 박정화는 문선명의 부인 최선길이 가지고 있던 원리원본을 뺏어 와서 김원필이 필사를 하고 박정화와 유효민이 수정을 하였다. 그리고 나서 유효원이 구성하고 정리하여 1957년 8월 15일에 <원리해설>을 만들었다. 그 후 1966년 6월 1일에 <원리강론>이라는 이름으로 출간하였다. 이들은 1954년 5월 3일에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世界基督敎統一神靈協會)’를 창립하고 초대협회장에 이창환을 내정했다.


실체가 드러난 문선명

문선명과 통일교의 실체를 폭로한 인물들이 있는데 문선명과 한학자의 며느리이며 후계자로 지목된 아들 문효진과 결혼을 한 홍난숙이 있다. 홍난숙은 미국에서 모시고 살았던 문선명과 한학자가 참부모님이 아님을 알았으며 남편인 문효진이 마약과 성도착증 환자임을 알고 통일교를 탈퇴한 후에 여러 비리들을 폭로하였다.

또한 통일교 목사였던 박준철은 문선명과 한학자 부부가 통일교 신도들의 가난한 생활은 무관심한 채,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위해 많은 사람들의 가정을 파탄시키고 재산을 착취하는 모습을 보고 30년 만에 탈퇴하여 통일교의 ‘합동결혼식’과 ‘통일왕국’의 실체를 폭로하기도 하였다.

참고자료:탁명환 <기독교이단연구>, 박영관 <이단종파비판>, 박정화 외 <야록 통일교회사

 

박태선과 천부교

 

 

박태선의 출생과 초기 신앙

 

박태선은 1917년 11월 22일 부친 박영진(朴永鎭)과 모친 김천태(金天泰) 사이에서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박태선은 덕천군에 있는 덕천교회 주일학교에 다녔다. 고향에서 소학교를 마친 후, 형편상 상급학교로 진학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낮에는 우유배달을 하고 밤에는 야간 고등공업학교를 다녔다. 고등학교 졸업 후 일본 동경 시내에 있던 대대목(代代木) 한인교회(韓人敎會)를 다녔고, 박정원(朴貞源)과 1941년 2월 8일 결혼을 한다. 10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귀국한 박태선은 일본 동경에서 알고 지냈던 김OO 목사가 시무하는 남대문교회를 출석하기 시작했다. 또한 성결교회 부흥사로 유명한 이성봉 목사의 부흥성회에서 강한 불의 임재를 체험했다고 한다.


박태선과 정득은의 만남

박태선은 남대문교회에서 평안북도 정주군 출신인 이태윤을 만났다. 이태윤을 통해서 1948년 말 또는 1949년 초에 삼각산 기도원장 정득은을 소개받는다. 1949년 2월부터 약 한 달 동안 정득은은 박태선의 집에서 방OO 이OO 김OO 세 남자와 ‘영체교환’을 명목으로 성교를 했다. 정득은과 성교를 한 이 씨는 다시 약혼녀 원OO 여인(26세)에게, 그리고 원 여인은 박태선에게, 박태선은 장모와 형수에게 영체교환을 했다. 또한 이 씨는 박태선 부인 박 씨에게, 박태선 부인 박 씨는 방 씨와 성관계를 맺었다. 이들은 이 영체계보라는 혼음행위를 통하여 ‘거룩한 피가 전수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1개월에 걸쳐 행해지던 ‘영체계보’는 양심의 가책을 느낀 장OO 여인(당시 38세)이 그의 남편 백모(46세) 목사에게 고백함으로 실체가 드러났다. 이 사건이 커질 조짐을 보이자 박태선은 자신의 집에서 영체교환을 명목으로 혼음행위를 한 신도들을 모두 쫓아냈고. 이로써 이 사건은 일단락됐다.


박태선의 집회와 이단 규정

서울로 돌아온 박태선은 경북 용문산 기도원 나운몽 장로와 변계단 권사가 인도하는 신유집회에 참석하여 영향을 받는다. 어느 날 변계단 권사가 창동교회 집회 인도를 취소하게 되자, 박태선이 담임목사의 허락으로 집회를 인도하게 됐다. 그 집회에서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치유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이때부터 박태선은 운영하던 공장을 형 박태국에게 맡겨버리고 나운몽 장로가 인도하는 부흥집회에 조력자로 따라나섰다.

박태선은 창동교회에 이어 1955년 1월 1일 무학교회를 시작으로 전국을 순회하며 부흥집회를 인도하기 시작했다. 부흥집회 중에서 박태선이 사람들의 뇌리에 확실하게 각인된 집회는 남산공원에서 열린 부흥집회였다. 또한 1955년 7월 3일 한강 백사장에서 열린 부흥집회에서는 ‘두 개의 불덩이가 천막을 비추는’ 신비한 일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1955년 11월에 대한예수교장로회 경기노회에서 김한이 1949년 2월과 3월에 걸쳐 행해졌던 혼음사건에 박태선이 연루되었다고 폭로했다. 1955년 7월 한국기독교연합회(NCC)는 박태선을 이단으로 규정했고, 1956년 2월 15일 경기노회에서 박태선을 이단 결정과 함께 제명을 했다.


전도관과 신앙촌 건립

박태선은 부흥집회를 통해 걷은 헌금과 귀중품으로 1955년 12월 25일에 원효로 3가 52번지에 2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전도관(傳道館)’ 건물을 지었다. 그리고 1956년 7월 3일에는 청암동에 ‘중앙전도관’을 건축했다. 11월 11일 전도관 신도들은 전국에서 모여 박태선을 ‘감람나무’로 추대했다. 1957년에는 전도관 숫자가 17곳이나 되었다.

전도관에 이어 박태선은 1957년 11월 1일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일대 15만평을 매입해 제1단지 ‘소사 신앙촌’을 건설하게 된다. 그리고 이 신앙촌에 신도들 7467명을 입주시켰다. 또한 박태선은 ‘덕소 신앙촌’으로 명명한 제2신앙촌을 1962년 7월 21일 경기도 양주군 와부읍 덕소리 한강변에 건설했다. 이후에도 1970년 2월 28일 경남 양산군 기장면 죽성리 해변가(현재는 부산시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일대)에 제3신앙촌을 건립하고 약 5000명 신도들을 입주시켰다.

참고자료:심창섭 외 <기독교의 이단들>, 최중현, <한국 메시아 운동사 연구>

 

            영생불사 외치다 73세로 종말

“자신은 5700세” 주장하기도…사후 ‘시온그룹’으로 명칭 바꿔

 

 
 
  

 

박태선의 이단 교리

 

박태선은 1957년 4월 30일 자신이 ‘하늘의 권세를 부여 받은 자’라고 했으며, 6월 9일에는 ‘감람나무’라고 발표했다. 이후에도 10월 23일 ‘동방의 의인’이라고 주장했으며, 10월 25일 ‘기독교는 마귀의 소굴’이라 하면서 ‘전도관만이 유일한 구원의 방주’라고 주장했다. 1958년 4월 6일에는 ‘재림주가 소래산(蘇來山)에 재림한다’고 외쳤지만 결국 종말론은 불발되었다. 8월 10일에는 한강수를 향해 ‘박태선이 축복하면 천연자원이 된다’고 하기도 했으며 또한 11월 2일에는 주님이 재림하는 징조로 ‘일곱 별이 나타났다’고도 했다. 12월 21일에는 ‘하늘에서 만나가 내렸다’고 주장을 하기도 했다.

전도관의 창조론을 보면 태초부터 하나님의 상대 관계로 사탄이 존재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타락론에서는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인해 피에 불순물이 섞여 피가 더러워졌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뱀과 하와의 성적타락에 의해 인간의 피가 더럽혀졌고 그 속에서는 악만이 나온다고 말하고 있다. 결국 성적 타락으로 인해 육체의 피가 더러워졌기 때문에 혈통인 피의 정화를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성적으로 타락하여 더러운 피를 가진 인간의 혈통을 구원하는 방법은 자칭 ‘동방의 의인’, ‘이긴 자’, ‘감람나무’인 박태선이라고 가르쳤다.


박태선과 신앙촌의 위기

제3신앙촌까지 건립하며 승승장구하던 박태선은 얼마 후 최대의 위기에 직면하게 됐다. 박태선은 “신앙촌에 거주하는 신도들은 영생 한다”는 말로 사람들을 미혹했는데, 부인 박정원이 사망을 한 것이다. 박정원은 1972년 2월 26일 3남 2녀의 자녀를 남긴 채 사망했다.

위기상황에서 전도관 신도 이용세가 <격암유록>이라는 책에 ‘박정원은 죽게 되어 있으며, 후처로 최옥순과의 결혼이 예언되어 있다’고 주장하며 이 난관을 헤쳐 나갔다. 하지만 김하원은 자신의 저서 <격암유록은 가짜, 정감록은 엉터리, 송하비결은?>에서 박태선과 전도관이 의도적으로 위서(僞書)인 <격암유록>을 이용하고 있다고 폭로하며, 많은 사람들이 <격암유록>을 ‘위대한 예언서’로 취급하는 분위기에 심한 우려를 표명하였다.

박태선 외에도 <격암유록>은 통일교 문선명도 사용했다. 또한 불교계 기독교계 증산도계 정역계 단군계 등 300여 개의 단체가 <격암유록>을 이용하고 있다. 신종교 중에는 영생교 조희성이 <격암유록>을 가장 잘 이용하고 있다. 박태선 전도관 출신인 신천지 이만희도 자신의 출현을 <격암유록>에서 예견하고 있다고 신도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전도관 신도들에게 영생을 선포했던 박태선은 자신의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자 실의에 빠지게 됐다. 이 무렵인 1977년경 조성기(趙聖紀)라는 사람이 찾아와 <격암유록>에 ‘박태선이 말세 성군’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을 들은 박태선은 천군만마를 얻은 듯 다시 재기할 기반을 다지고자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서 조성기는 말을 바꿔 자신의 이름이 <격암유록>에 ‘진정한 성인’으로 기록되어 있다며, 박태선과 떨어져 신종교를 만들었다. 이에 박태선은 크게 분노하여 <격암유록> 사용을 전도관에서 금지시켰다.


천부교 설립과 박태선의 죽음

1980년 2월 쯤 두 사람이 박태선을 찾아왔다. 그들은 <주역>을 보여 주면서 “박태선은 5700년 전에 태어난 하늘의 사람이고 구원자”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박태선은 1980년 4월 5일 전도관 간부들을 모아 놓고 “성서는 98%가 가짜이고, 성서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개XX이며, 예수는 마귀대장으로 바울을 조종하여 자신을 신격화 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또한 자신의 나이는 “5700세로 이긴 자이며, 감람나무인 자신은 영생한다”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어 박태선은 1980년대 들어서서 교단명을 ‘천부교(한국천부교전도관부흥협회)’로 변경하였고, 1980년 11월 1일 재단법인 명칭도 ‘한국예수교전도관유지재단’에서 ‘한국천부교전도관유지재단’으로 법인정관변경 승인신청서를 제출했다.

자신을 구원자 영생자로 가르쳤던 박태선은 그 종말을 고하게 됐다. 1990년 2월 5일 박태선은 서울 백병원에서 셋째아들 박윤명을 후계자로 지목하고 사망하게 됐다. 영생불사를 외쳤던 박태선의 죽음은 신도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신도들의 이탈을 가져왔다. 현재 천부교는 시온그룹의 명칭을 가지고 재기를 노리고 있다.

참고자료:박영관 <이단종파비판1>, 김하원 <격암유록은 가짜, 정감록은 엉터리, 송하비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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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69 120년의 의미 웹섬김이 04-14 90
3368 네피림과 유명한 용사 웹섬김이 04-14 99
3367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 웹섬김이 04-14 92
3366 노아가 방주를 지은 기간 웹섬김이 04-14 194
3365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 웹섬김이 03-29 143
3364 그리스도의 부활이 중요한 이유 웹섬김이 03-29 112
3363 부활절 기도(영문,한글) 웹섬김이 03-29 89
3362 부활절 대표 기도문 웹섬김이 03-29 107
3361 화장예배 설교(믿음의 가정인 경우) 웹섬김이 02-24 249
3360 하관예배 설교 웹섬김이 02-24 241
3359 하관예배 설교(불신자의 가정인 경우) 웹섬김이 02-24 234
3358 하관예배 설교(믿음의 가정인 경우) 웹섬김이 02-24 214
3357 발인예배 웹섬김이 02-24 191
3356 발인예배 설교(불신자의 가정일 경우) 웹섬김이 02-24 194
3355 발인예배 설교(믿음의 가정인 경우) 웹섬김이 02-24 183
3354 입관예배 설교 웹섬김이 02-24 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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