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me의 제5대 황제 네로
Rome의 제5대 황제 네로는 폭군으로 유명하다.
기독교 신자들이 일요일 예배 때마다 암송하는 사도신경에 이름이 나오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승인한 유다 총독 본디오 빌라도 보다도 더 잘 알려져 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솅키에비치의 소설 쿠오바디스가 영화로 나와 많은 사람들이 본 탓도 있지만 네로 자신이 악의 화신이 된 것은 친어머니 아그립피나와 본처 옥타비스를 살해하고 스승이자 집정협력자였던 로마 철학의 대표주자 세네카를 죽이고 허리우두의 영화흥행사들을 기쁘게 한 로마시를 불태운 것과 기독교도들을 방화범으로 몰아 잔혹하게 죽인 것으로 악명을 떨치게 된 것이다.
네로가 이렇게 잔인한 살인마가 된것은 어머니 아그립피나에게 잘못이 있다.
아그립피나는 로마 초대황제 아구스투우스(옥타 비우스)의 혈통으로 명장 게르마니쿠스의 딸이며 3대 황제 칼리굴라의 여동생이다. 칼리굴라 황제는 낭비벽이 심해 선정과 악정의 바로미터가 되는 세금폭탄으로 로마인들에게 악정을 펴 근위대 대장 두명에게 목을 잘려 죽었다.
아그립피나는 34세의 나이에 미모의 8등신으로 과부가 되여 아버지의 동생(숙부) 홀아비인 클라우디우스 황제를 유혹, 결혼하여 왕비가 된다. 아그립피나는 권력을 휘두를 야망에 불타는여자였다. 칼라 굴라 황제가 악정을 베풀자 친오빠 암살음모에 가담해 체포 되여 나폴리 앞 바다 섬에 유배 되여 수영으로 한세월 보냈다.
왕후가 된 아그립 피나는 교묘한 술수를 부려 남편 클라우디우스 황제를 독버섯으로 살해하고 로마근교에 주둔한 군대에 찾아가 돈을 나누어 주다가 밀약 해 황제의 친아들을 제치고 군대의 후원으로 원로원의 지지를 얻어내 네로에게 제위를 찬탈하게 했다.
고대사에 정통했던 아그립 피나가 표상으로 삼은 것은 기원전 4세기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의 어머니 올림피아스 를 모방한 것이다.
마케도니아의 필립 2세가 그리스를 침공하여 그리스를 멸망시키고 새 여자를 후궁으로 들여 그 소생으로 왕위를 계승하겠다고 술좌석에서 발표하자 찬밥이 된 왕후 올림피아스가 아들과 자신의 앞날을 위해 아들의 친구를 꼬여 필립 왕을 암살 시켜 알렉산더를 제위에 앉힌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네로는 나약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자신에 대한 악평이나 반감. 적개심을 견디지 못했다. 이런 성격의 사람은 자칫 극단에 치닫기 쉽다. 잃어버린 지지를 되찾으려고 허둥 되는 추태를 보이거나 과민하게 반응하여 공격적인 태도를 취한다. 정신의 평정을 잃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었다.
네로의 정신적 문제 역시 어머니 아그립 피나의 소행으로 생각된다.
외형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스승으로 삼은 알렉산더의 교육을 본받아 철학자 세네카를 유배에서 풀어주고 네로의 스승으로 삼았으나, 네로의 이중 성격 심리와 이유가 분명치 않은 잔인한 행동들은 네로에게 동방에서 건너온 비약종 류를 복용시켜 정신상태를 흔들어 꼭두각시로 만들고 배후 집정자로 정권욕을 성취시키려 한 것이라 추측된다
그러나 운명이란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친아들 네로에게 며누리 옥타비아와 함께 죽임을 당하는데 창녀출신이며 이미 두 번 결혼한 적이 있는 포파이아와 결혼하는데 장해물이 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네로는 자기 절제력이 전혀 없고 사물을 연결하여 사고하는 신경세포가 망가져 있었다. 가리키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의 관계에서 스승이 아무리 훌륭해도 배우 는 사람의 자질이 형편없으면 배움은 소용이 없어진다.
그런 가장 대표적인 예가 예수와 가롯 유다의 관계에서 볼 수 있다.
네로 제위14년 동안 서기54년 16살에 즉위하여 59년 어머니를 살해하고 , 64년 나폴리의 야외극장에서 가수로 데뷔하는 등 여러 사건들을 분석할 때 약물중독자로 본 것은 절대 무리한 상상이라 할 수 없다.
서기64년 7.18일 로마 대경기장 관람석 밑 가게에서 불이나 9일 동안 로마시의 40%를 태웠는데 마침 아프리카 쪽에서 불어오는 강한 동남풍으로 소방수들이 있어도 불길을 잡을 수 없었다. 불이 났을 당시 네로는 무더위를 피해 로마에서50K떨어진 해변도시 안치오의 별장에 머물고 있었다. 불이 난 것을 이튿날 알았다. 위대한 정치가란 위기상황이 닥치면 재빨리 적절히 대처하고 승부에서 질게 뻔한 상황에서라도 신념을 가지고 전력투구하면 승리의 길이 보이는 것이다.
로마에 화재가 났다는 것을 알자말자 네로는 두필의 말이 끄는 전차를 몰고 아피아 가도를 따라 수도에 들어가 화재진압 과 이재민 대책을 진두지휘 한 것이 문헌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화재가 진압된 후 불탄 그 자리를 황제의 새로운 황금궁전으로 지을 것과 자연 생태학적인 정원을 조성하려고 하였을 때 문제가 생겼다.
타인의 불행을 자신의 이익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화재를 당해 고통 받는 이재민들의 입으로부터 네로가 로마를 불태웠 다는 의심을 받게 된다. 순식간에 이 소문은 로마 전체에 퍼져 네로는 시민들이 자기를 죽일지 모른다는 강박관념에 쌓이게 되었다. 이런 때면 어김없이 나쁜 꾀를 내는 사람들이 어느 시대이건 있기 마련이다.
기독교도에게 방화죄를 뒤집어씌우기로 한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체포된 기독교도들은 잔인한 고문과 함께 이벤트의 황제인 네로의 기획, 연출로 잔혹한 구경거리로 삼아 산채로 불태우고 십자가에 못 박고 동물에게 먹히는 레퍼토리로 바티칸 경기장은 여려날 축제를 벌어졌다.
하지만 기독교도들이 당한 잔인한 살육 극은 네로의 기대 대로 되지 않고 시민들의 동정심을 자극해 저런 잔인한 인간이 면 로마를 불태웠을 것이란 확신으로 굳어진다.
시민들은 알고 있었다. 이런 이벤트 행사는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네로의 잔인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함이란 것을. 그러나 이때도 잘 넘어 갔다. 역사를 공부하면서 알게 될 수 있는 것은 정의의 심판은 항상 좀 늦게 온다는 것이다. 이듬해 서기 65년 제2회 로마 올림픽이 열리는 해였다. 이 제전의 당초 목적은 육체와 시와 변론을 겨루는 대회이나 황제는 이번에 시들어 버린 인기를 만회하려고 자작시에 맞춰 노래하는 경연대회에 자기도 출전하겠다고 말했다.
가수데뷔는 나폴리에서 이미 끝냈고 박수갈채를 받았기 때문에 잘해 낼 자신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민중 앞에 노래를 부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여기에 당황한 원로원은 “탤런트 황제 등장 ”이라는 추문을 막기 위해 경연대회가 열리기 전에 재빨리 네로를 변론부문과 가창부문에 우승자로 결의해 버렸다. 그러나 네로는 이를 거부했다. 원로원이 밀어주지 않아도 뒤 배경이 없어도 자기는 재능이 있으니까 다른 출전자들과 대등한 입장에서 겨루어 엄정한 판단에 따라 실력으로 월계관을 쟁취할 것이라 엄명한다.
이제 모두 두 손 놓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날 폼페이우스 극장은 노래하는 황제를 보러온 시민들로 만원을 이루었 고 무대에 올라가 황제는 리라를 켜면서 자작시를 자작곡에 맞추어 노래하기 시작했다. 전행오는 문헌을 참고할 때 가수의 생명인 목소리는 그런 대로 들어줄 수 있지만 성량이 부족하다는 평가다. 원로원 의원들의 귀속 말 평가는 “제멋에 겨운 풋내기 수준”이라는 악평이었지만 그런 대로 열심히 노래했고 심판들의 판정을 기다리는 동안 다른 출전자들과 마찬가지로 무대 한쪽에서 리라를 가슴에 껴않고 있는 겸손한 자세를 취했다.
그 다음은 기록에 나와 있지 않으나 경연장 밖에 대기하고 있는 근위병들에게 언제나 황제명예를 훼손한 반역자를 체포하도록 명령할 수 있는 네로에게 월계관을 거부할 수 있는 심판관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러나 존경은 받지 못하는 지도자는 임무를 추진해 나갈 수가 없다는 것을 네로는 알지 못했다.
그러자 피소 라고하는 귀족의 네로 암살음모가 있었는데 제보자의 밀고로 10여명의 일당은 체포 되여 처형 되였으나 고문 받는 중에 이 사람 저 사람 연결 되여 스승인 세네카를 위시하여 군대의 사령관 3인의 이름이 나오자 네로는 거짓 지령으로 이들을 로마 근교로 불러 변명의 기회도 주지 않고 처형해버렸다. 그 중에는 코르불로 라는 명장은 수 없는 전공으로 병사들의 존경을 받는 장군이었다. 이즈음 네로에게 밤이면 자기가 죽인 사람들의 망령이 나타나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았다. 햄릿에게 나타난 망령은 안개가 끼면 낮에도 나타났으나 네로에게 나타난 망명은 밤에만 나타나는 망령 이었다.
로마시민들에게 네로의 노래는 더 이상 관심의 대상이 안 되여 외면당하자 국외시장을 겨냥한 네로는 그리스 전역을 돌면 노래연주 순회공연을 떠난다. 원로원 의원 중 가이우스 율리우스란 사람이 격문을 띄웠다. “네로는 제국을 사유화 하고 제국의 최고 책임자라면 할 수 없는 행동으로 일관해 왔다. 제국의 지도자로 어울리지 않은 인물이니 한시 바삐 퇴위시키고 제국을 구하자”는 내용이었다. 격문을 받은 사령관 중 루프스란 밑바닥서부터 올라간 자는 황제에 충성을 맹세하였기 배반할 수 없다 응하지 않았으나 갈바라는 장군의 생각이 달랐다.
황제에 충성을 맹세한 것은 네로가 아니라 로마에 충성을 맹세한 것이며 로마 시민을 위한 것이 충성이라는 갈바 장군의 결심에 이베리아 반도전체가 호응하여 일어났다.
갈바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격한다는 소문이 들리지 황제 곁에 붙어 권력의 행사하며 나뿐 꾀를 제공하던 무리들은 모두 도망쳤다. 침몰하는 배에서 도망쳐 나가는 쥐들처럼 네로의 주위에서 없어졌다.
원로원에서 “네로를 국가의 적”으로 선언했다. 서기68년 6월 9일. 30세 생애를 네로는 자살로 마감하여 로마인들에게 아마추어 예술가의 노래를 더이상 들려줄수 없게 되었다.
* 이 글은 세계역사 3 대 로마제국. 폴 타르크 영웅전. 로마인 이야기. 등을 참고. 인용한 것입니다.
* 네로는 참 재미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에 의해 수없이 많은 죄없는 그리스도인들이 참혹한 죽음과 박해를 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것이다. 그에 의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자와 맹수의 밥으로, 살아있는 채 화형으로, 또 감옥으로...베드로와 바울도 네로에 의해 순교 당했다.
초기 기독교의 역사는 박해와 순교의 피로 피어난 생명의 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