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1-02-24 06:29
[2]고통의 신학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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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6,347  

 

3. 그리스도인과 고통

 

고통은 불신자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만들 뿐 아니라 그렇게 해서 참 하나님을 만난 신앙인에게도 여러 가지 유익을 줄 수 있다. 이 역시 죄가 있는 세상에서 고통이 지닌 유익이다.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고통의 유익은 부정적, 긍정적 이중의 의미를 갖는다. 첫째로 죄에 대한 징계로 주어지는 고통이 있다. 이런 고통은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게 만든다. 그리스도를 믿어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도 죄와 싸워 지는 경우가 경우가 많다. 그럴 때 하나님은 고통을 이용해 우리를 꾸짖으신다. 시편에는 하나님의 징계를 통해 죄를 깨닫고 거룩함에 나가아게 된 신앙인의 고백이 많이 나온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 119:67, 71).

   

신약성경도 그리스도인이 죄를 지었을 때 아버지 하나님이 사랑의 매를 때리신다는 것을 자주 언급하고 있다 (히 12:5-13; 벧전 2:20; 3:17). 하나님은 말씀이나 성도의 교제를 이용하시기도 하지만 때로는 고통을 사용하신다.21) 고통은 효과가 있다. 루이스의 말처럼 고통은 우리를 가만 있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멀리 하게 만든다 (벧전 4:1). 고통은 우리를 거룩함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22) 죄 없으신 우리 주님이 고난을 통해 완전함에 나아가셨다면 죄 가운데 사는 우리는 더욱 큰 유익을 기대할 수 있다 (히 2:11).

   

이런 사랑의 매를 맞을 때마다 기억할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다. 사람은 모두 죽은 다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 하나님이 각 사람을 행한 대로 심판하실 것이라는 경고가 성경 곳곳에 담겨 있다. 오해하지 말자. 구원이 내 공로에 달렸다는 뜻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믿어 좋은 나무가 되었다면 반드시 좋은 열매를 맺게 되어 있다는 말씀이다. 구원받은 성도는 징계의 고통을 겪을 때마다 우리의 죄가 하나님의 진노를 낳고 우리의 고통으로 이어졌음을 깨닫는다. 그 죄와 고통 때문에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음을 깊이 깨닫는다. 우리 주님이 우리 대신 이미 심판을 받으셨다. 따라서 훗날의 심판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자신의 죄를 부끄러워하고 그런 나를 구원하신 은혜에 감사하면서 죄를 멀리하게 된다. 징계로 받는 고통은 하나님께 감사드려 마땅한 은혜의 계기다.

 

두 번째 고통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겪는 고통이다. 그리스도인은 죄를 짓지 않고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산 결과 고통을 겪기도 한다. 한 마디로 복된 고통이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 자체가 이 세상에서는 고난이다. 주님은 당신의 제자 된 우리가 세상의 미움을 받을 것이라 말씀하셨다 (요 15:18-19).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사는 삶은 핍박을 부르는 삶이다. 주님은 그런 사람의 복에 대해 말씀하셨다 (마 5:10-12). 우리가 주님의 제자로서 겪는 고난은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누리는 영광스러운 삶이다 (행 14:22; 벧전 2:20; 3:14, 17). 이 경우의 고난은 우리의 영적 신분을 일깨우고 확인시켜주는 훈장과 같은 복된 고난이다. 그래서 주님의 사도들은 채찍질을 당한 뒤 주의 이름으로 고난을 받았다며 기뻐하였다 (행 5:41). 이런 고난은 우리에게 인내의 열매를 준다 (약 1;2-4). 우리에게 연단의 유익을 주어 구원의 완성을 향한 우리의 소망을 더욱 굳게 만드는 유익이 있다.

 

따라서 고통은 어떤 것이든 누구에게든 유익이 있다. 불신자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의 확성기 역할을 하고 성도들은 죄를 멀리하고 그리스도의 제자 된 기쁨을 누리도록 돕는다. 따라서 고통을 만날 때 우리가 보여 마땅한 첫째 반응은 감사요 찬송이다. 우리는 고통을 겪을 때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더욱 굳게 다져야 한다. 고통은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게 만든다. 물론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의 일이다. 하나님은 고통이 없는 천국을 약속하셨다. 구원이 완성되는 날 우리에게는 더 이상 고통도 눈물도 없을 것이다. 다만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고통이 있고 그 고통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하나님을 더욱 신뢰할 따름이다. 죄 때문이든 순종의 결과든 구원받은 성도가 경험하는 고통은 하나님을 신뢰할 이유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라. 문제가 되는 고통

 

1. 부당한 고통, 까닭 모를 고통

 

성경의 기본 구도에 비추어 본 고통의 문제는 이렇게 간단하다. 처음에는 세상에 고통이 없었다. 창조다. 그런데 죄 때문에 고통이 왔다. 타락이다. 죄 있는 세상에서 고통은 인간이 죄인임을 일깨우고 죄를 멀리하게 하는 유익이 있다. 구원이다. 마지막 날 하나님은 우리를 이 모든 고통에서 건져주실 것이다. 구원의 완성이다. 이것이 고통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이다.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다. 그런데 고통에 대한 논의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고통은 생각보다 복잡한 주제다.

   

이유가 무엇인가? 이런 범주에 해당하지 않는 고통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것인가? 첫째는 부당한 고통이다. 죄가 세상에 들어올 때 고통을 도입하되 부당하게, 억울하게, 악과 뒤섞어 도입했기 때문이다. 이런 고통은 신자, 불신자 모두에게 문제가 된다. 불신자의 경우 이런 부당한 고통은 죄의 존재를 깨닫게 하기보다 오히려 하나님을 거부하게 만들 수 있다. 성도들 역시 공의의 하나님을 믿기에 불의한 고통의 존재는 곤혹스럽다. 둘째는 까닭을 알 수 없는 고통이다. 이런 고통은 주로 그리스도인에게 문제가 된다. 하나님의 섭리와 약속을 믿기 때문이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주님의 제자로 살다가 겪는 고난도 아닌데, 어느 날 뜻밖의 고통이 닥친다. 아무리 생각하고 기도해도 이유를 알 수 없다. 이런 고통의 존재는 그리스도인을 시험에 빠뜨릴 수도 있다.

 

구약 시편에는 불의한 고통으로 신음하는 성도들의 부르짖음이 가득하다. 믿음의 사람이 세상의 불의 특히 선인의 고난과 악인의 승리로 괴로워한 이야기가 시편에 나온다 (시 73:1-28). 악인은 극악한 죄를 짓고도 벌은커녕 오히려 승승장구한다. 반대로 선인은 바르게 살면서도 고난을 겪고 심지어 하나님께 꾸지람도 듣는다. 분명히 죄 때문에 고통이 왔는데 현실 가운데서는 죄와 고통이 서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선지자 하박국도 악인이 의인을 괴롭히는 부당한 고통을 두고 하나님께 호소했다 (합 1:13). 자연종교는 윤회론이나 운명론 같은 것으로 이 문제를 풀어보려 시도한다. 성경은 어떤가? 성경은 우선 그런 부당함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리고 그런 부당함 역시 죄가 낳은 악의 하나임을 말한다. 그리고 성도들에게 그런 부당함에 대해 분노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기다라고 명령한다 (시 37:1).

 

불의한 고통과 더불어 문제가 되는 것은 까닭을 알 수 없는 고통이다. 성도들이 살면서 부단히 겪는 고통이다. 평생을 주님을 섬기며 살던 중년 장로가 이른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뜬다. 사역의 열정을 불태우던 젊은 목사가 교통사고로 부인과 어린 아이를 두고 갑자기 죽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통 자체의 존재보다 부당한 고통, 까닭을 알 수 없는 고통의 존재가 문제다. 사실 인류가 경험하는 수많은 고통이 이 범주에 속한다. 이런 것 때문에 고통이 진짜 ‘문제 (Problem)’가 되었다.23) 고통에 대한 논의도 복잡해졌다. 신자들은 고통의 의미를 찾지 못해 당황하게 되고 불신자들은 하나님을 찾는 대신 오히려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려고 든다.

 

고통의 복잡성을 염두에 둘 때 우리는 현실 가운데서 고통의 의미를 함부로 규정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나 자신이 고통을 겪을 때도 죄에 대한 징계인지 말씀대로 살다 겪는 고난인지 아니면 그와 무관한 다른 경우인지 말씀과 기도 가운데 깊이 돌아보아야 한다. 타인의 고난일 경우에는 섣부른 판단을 하지 않도록 더더욱 조심해야 한다. 도박장에 다녀오던 버스가 사고가 나 열 몇 명이 죽었지만 그것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교회 수련회에 다녀오던 버스가 사고가 나 열 몇 명이 죽은 일도 얼마 뒤에 있었기 때문이다. 낙뢰로 인한 죽음을 저주라 생각하는 것은 동양적 미신이다. 조심해야 한다. 고통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세상이 악과 뒤엉켜 복잡해졌기 때문이며 성경은 그런 복잡한 세상에 대해 정확한 분석과 답을 주기 때문이다.

 

 2. 불의한 고통의 문제

 

 불의한 고통은 모두에게 어려움을 주지만 특히 불신자들이 기독교를 공격할 때 무기로 사용한다. 하나님을 찾는 계기가 되라고 주신 고난이 그 존재의 불의성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거부하고 공격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자연종교는 윤회나 운명론 같은 형이상학의 논리를 이용해 답을 피해 간다. 현실 가운데서 입증할 수 없는 것이니 반박도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모든 고통이 죄 때문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은 현실 가운데서 입증되는 가르침이다. 게다가 성경은 심판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을 가르치고 그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가르친다. 그런데 세상을 보면 죄와 고통이 직접 연결되지 않는 경우가 많고 오히려 반대인 경우조차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통이 죄에서 왔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역으로 이용해 기독교 복음을 공격한다.

 

 불신자들이 기독교를 공격하는 논리는 다소 간단하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또 그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이다 (시 136;1). 그런데 세상에는 고통이 너무나 많다. 죄 때문이라 하더라도 죄에 비해 너무 심한 고통이 있다. 또 고통 자체도 문제지만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고통도 많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도 많고 악이 초래하는 억울한 고통도 많다. 죄 지은 사람은 떵떵거리고 착한 사람이 오히려 고통을 당한다. 이런 세상에 만약 신이 있다면 능력이 없어 고통을 없애지 못하거나 아니면 인간의 고통을 즐기는 나쁜 신일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인이 말하는 전능하면서도 동시에 좋으신 그런 하나님은 없다고 불신자들은 공격한다. 한 마디로 기독교의 가르침은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이런 공격에 대항해 등장한 논리가 소위 신정론 (神正論, Theodicy)이다. 신정론은 악과 고통의 문제를 두고 하나님을 옹호하는 논리로서 교회사에서 천 년 이상 사용되어 왔다. 기본적인 틀은 대개 비슷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빛과 그림자의 논리로 설명한다. 선이 빛이라면 악은 그림자로서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게 마련이라는 논리였다. 스토아 우주론의 영향을 받은 논리로서 칼뱅도 우주 전체의 역사가 하나님의 선한 계획이라는 논리로 부당한 고통을 설명한다. 철학자 라이프니츠는 가능한 최상의 세계라는 논리를 편다. 이론적으로는 고통이 없는 세상이 가능하겠지만 현실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고통이 없을 수 없는데 지금 있는 세상은 존재할 수 있는 세상 가운데서는 그나마 가장 좋은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들은 나름대로 시대 정신에 맞추어 복음을 변호하려 한 시도들이다. 그렇지만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우선은 너무 차가운 논리다. 고통으로 신음하는 이들에게 이런 사변적인 논리는 전혀 와 닿지 않는 공허한 이야기다. 기독교를 공격하는 자들 역시 이런 차가운 논리에는 잘 설득되지 않는다. 게다가 이런 논리는 고통받는 자들의 고통을 증대시킨다. 하나님의 책임을 면제시켜 드리려 하다 보니 모든 책임을 고통받는 당사자가 뒤집어써야 한다. 마치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한 것처럼 이미 충분이 아픈 사람을 더 아프게 만들 뿐이다. 결국 승리자의 관점에서 만는 논리로서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 조금의 위로도 되지 못한다.

 

지난 세기 들어 고통과 악의 문제에 대한 새로운 답변이 등장했다. 미국의 기독교 철학자들 특히 개혁 인식론을 제창한 앨빈 플랜팅가가 주도한 ‘자유의지 변론 (Free Will Defense)’으로서 기존의 신정론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다. 논리는 이렇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실 때 사람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셨다. 그런데 그 자유가 완전한 자유가 되려면 자신을 창조한 창조주마저도 거역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인간은 그 자유로 정말로 창조주를 거역하고 말았다. 그 결과 고통과 악이 오게 되었다. 따라서 사람이 자유 의지를 남용한 결과 생겨난 고통과 악, 그리고 사람이 자유의지로 만들어 내는 고통과 악에 대해서는 사람 자신이 책임을 져야지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할 수 없다. 하나님께 책임을 묻는 것은 사람을 왜 이렇게 멋지게 만드셨느냐 따지는 것과 같은 무지, 다시 말해 하늘을 보고 침을 뱉는 논리가 되고 만다.

 

자유의지 변론에도 물론 한계는 있다. 사람의 의지와 무관한 고통 이를테면 천재지변 같은 고통에 대해서는 답을 주지 못한다. 그렇지만 적어도 사람이 자신의 의지로 만들어내는 잘못에 대해서는 하나님을 비난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우리가 겪는 까닭 모를 고통이나 불의한 고통 가운데 사람이 만들어내는 것이 참 많다.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사람이 책임을 져야 함을 일깨운 것이다. 궁극적인 답은 종말에서 찾는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약속이다. 따라서 우리는 부당한 고통을 볼 때마다 그것이 죄에서 왔다는 사실과 인간이 그 부당함을 증대시킨다는 것을 인식하고 일깨워야 한다. 그러면서 내가 부당한 고통을 받는다면 신원해 주실 하나님을 의지하여 견디고, 혹 그런 불의의 희생자를 볼 때도 같은 위로를 전할 수 있다. 그리고 나든 다른 사람이든 심판하실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절대로 그런 불의한 고통을 가하는 자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3. 까닭 모를 고통의 문제

 

불의한 고통과 더불어 문제가 되는 것은 까닭 모를 고통이다. 불의한 고통과 달리 이런 고통은 사실 성도들에게만 문제가 된다. 불신자의 경우 우주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고통에 대해서도 굳이 자연적 인과론을 뛰어넘는 이유나 의미를 찾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또 까닭 모를 고통은 대부분 남 아닌 자신의 문제다. 남이 고통을 왜 겪는지는 우리로서 알 도리가 없지만 나 자신의 경우는 어느 정도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인 내가 큰 재난을 겪는다. 불치의 병에 걸린다. 사랑하는 사람이 병이나 사고로 갑자기 죽기도 한다. 일단 말씀을 순종해 겪는 고난은 아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죄를 지은 데 대한 벌로 보기도 어렵다. 물론 어떤 고통이든 가장 먼저 자신의 죄를 돌아보게 만들지만 내가 겪는 고통의 크기가 내가 지은 죄에 비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경우가 있다. 엄밀하게 말하면 가장 작은 죄라도 영원한 멸망을 부를 수 있지만 우리는 성경을 근거로 죄와 벌의 상관관계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리고 훔친 것은 네 배로 갚는 것 등이다. 그런데 지금 내 고통은 내가 한 일에 비해 너무나 크다. 그럴 때는 이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이유라도 알면 좋겠는데 도무지 뜻을 알 수 없는 그런 고난은 성도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성경은 이런 종류의 고통에 대해 직접적인 설명은 주지 않는다. 대신 구약 욥기가 이런 고통을 대하는 방법에 대해 뛰어난 지혜를 제공한다. 욥은 완벽한 삶을 살았다. 그런데 고난을 받았다.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난을 받았다. 이유가 무엇인가? 이유는 없다. 사탄이 장난을 쳤다. 사실 하나님을 너무나 완벽하게 섬긴 그게 이유라면 이유다 (욥 1:8-12; 2:3-6). 그런데도 욥은 참았다. 재산을 하나하나 다 날리고 열 명의 자녀까지 한 순간 다 잃고 심지어 온 몸에 병까지 걸린 뒤에도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하나님께는 그런 주권이 있음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러면서 욥은 자신에게 왜 그런 고통이 왔는지 이해할 수 없어 답답한 가슴을 쳤다. 고통 자체도 엄청났지만 욥으로서는 그 고통의 이유를 모르는 것이 더 큰 고통이었다 (욥 10:1-3).

 

욥의 친구들은 죄와 벌의 원리만 알았다. 그래서 욥이 겪는 극도의 불행은 욥이 은밀하게 지은 극악한 죄악 때문이라고 믿고 그 죄를 자백하라고 다그쳤다. 욥을 위로하자고 시작된 친구들의 조언은 결국 욥의 상처에다 죄인이라는 오명까지 씌워 욥의 고통만 키우고 말았다. 욥기 마지막에서 하나님은 욥의 친구들의 논리가 틀렸음을 확인해 주신다 (욥 42:7). 쉽게 말해 이 세상에는 까닭을 알 수 없는 고통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욥기를 읽었기 때문에 욥의 고통이 그저 사탄의 장난질 때문이었음을 안다. 욥이 아무 잘못이 없었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 욥기를 찬찬히 읽어보면 욥 자신은 나중에 다시 복을 받고 난 뒤에도 자기가 왜 그런 고난을 겪었는지 이유를 몰랐다.

 

까닭 모를 고통에 대해서는 우리 주님도 몇 번 말씀하셨다.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난 사람을 두고 제자들이 누구의 죄 때문일까 물었을 때 주님은 그 사람이나 부모의 죄 때문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다 (요 9:1-3). 그렇다고 그 사람이나 부모가 주님을 잘 섬겼기 때문에 그 사람이 장애인이 된 것도 아닐 터이니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물론 그 사람을 통해 주님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지만 그것은 이후의 일이지 원인은 아니다. 또 빌라도의 정치 탄압으로 억울하게 죽은 갈릴리 사람들이나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죽은 열여덟 명 역시 그들이 남보다 죄가 더 많아 그런 고난을 겪은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눅 13:1-5). 여기서도 주님은 고통을 죄와 연결시켜 회개할 것을 촉구하셨지만 그 역시 미래의 일로서 그들이 남다른 고난을 겪은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말씀해 주지 않으셨다.

 

까닭 모를 고통이 우리에게 당혹감을 주는 이유는 하나님의 외면 때문이다. 욥의 경험 그대로다.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이라도 해 주시면 좋겠는데 하나님은 침묵하신다. 파스칼은 이런 하나님을 가리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라 부른다.25) 씨 에스 루이스도 아내의 죽음 이후 경험한 그런 답답함을 이렇게 토로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이건 정말 불안한 조짐이다. 우리가 행복할 때는 너무나 행복한 나머지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느낌조차 없다........ 하지만 상황이 정말 절박할 때, 다른 그 무엇도 도움이 안 될 때 하나님께 가 보면 어떻게 되던가? 면전에서 문이 쾅 닫히고 안에서 빗장을 지르고 또 지르는 소리가 들린다. 그런 다음에는 침묵이다.”26)

 

일이 잘 풀릴 때는 하나님이 늘 가까이 계시는 것 같다. 그럴 땐 사실 하나님을 잘 찾지도 않는다. 혹 고통을 당해도 내 죄 때문이라면 얼른 하나님께 회개하면 된다. 의를 위해 받는 고난이라면 하나님께 찬양도 드릴 수 있다. 그렇지만 까닭을 알 수 없는 고통을 겪을 때는 하나님이 멀리 계신다. 하나님이 정말 필요할 때, 다른 방법은 도무지 도움이 안 될 때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은 면전에서 문을 쾅 닫고 사라지시는 것 같다. 빗장을 지르고 또 지른 다음 끝없는 침묵이 이어진다. 루이스는 그럴 때는 오래 기다릴수록 괴로워질 것이라 했다. 믿음마저 흔들릴 수 있다. 까닭 모를 고통은 성도들을 당혹스럽게 한다. 가장 좋은 것만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마저 갑자기 남의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다 (롬 8:28).

 

마. 고통과 하나님의 사랑

 

1. 문제의 해결

 

고통은 문제다. 성경을 알고 난 다음에도 문제다. 아프기 때문이다. 까닭을 알 수 없는 고통, 의롭지 못한 고통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성경은 고통의 원인과 결과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의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책까지 제시한다. 고통의 원인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모든 고통 곧 보편적 고통에 대한 해결이다. 죄로 인한 고통도 아프다. 말씀대로 살다가 겪는 고통도 비록 영광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아픈 건 아픈 것이다.27)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이라면 더 그렇다. 안 믿는 사람들이 제기하는 하나님에 대한 공격도 고통의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성경은 이 모든 것에 대해 명확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이유를 알든 모르든 모든 종류의 고통에 대한 성경의 답은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고통에셔 건지신다는 약속이다. 보편적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보편적 구원이요 위로다. 사람은 죄를 지어 고통과 죽음을 가져왔지만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우리 사람을 위해 그 고통을 제거하시고 우리에게 다시금 고통 없는 상태를 약속하신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 구원론이다. 복음의 핵심이다. 인간의 죄를 해결하고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을 말하는데 그 구원의 방법이 놀랍다. 하나님 당신이 피조 세계로 들어오셔서 인간이 초래한 모든 고통을 친히 겪으시는 방법이었다.

 

기독교 복음만이 고통을 해결한다. 자연종교는 보편적 고통을 몰랐고 고통의 참 원인도 몰랐다. 혹 알았다 해도 피상적인 해결방법 외에는 제시하지 못한다. 복음이 가르치는 것처럼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친히 피조 세계로 들어오셔서 그 고통을 직접 겪으심으로써 해결하실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복음이 가르치는 것을 듣고난 다음에도 납득하거나 수용하지 못한다.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 아니면 어리석음일 뿐이다 (고전 1:18, 23). 자연의 한계다. 하지만 성경은 처음부터 피조물의 “환난에 동참”하시는 창조주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사 63:9).

 

사람이 죄와 고통으로 죽었을 때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친히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셨다. 사람이 죄를 지은 순간 여자의 씨를 약속하셨고 (창 3:16) 그 약속대로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어 오셨다. 그리고는 우리가 겪는 모든 고난을 똑같이 맛보시고 우리 고통의 정점인 십자가 죽음까지 죽어 주셨다. 주님이 겪으신 고통은 가장 부당하고 억울한 고통이었다 (벧전 2:22-25). 하나님이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방법은 간단히 말해 하나님 당신이 몸소 그 고통을 겪으시는 방법이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그렇게 고통을 겪으신 그 일이 고통에게 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고통을 눌러 이긴 승리였다는 사실이다 (고전 1:18; 골 2:15). 십자가 고통은 고통의 원인인 죄를 없애 (요일 3:5) 우리를 고통 그 자체에서 해방시켰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 대속으로 주님을 믿은 우리 모두의 죄가 씻겼고 우리 고통의 문제도 해결되었다.

 

주님의 생애 전체가 고난의 생애였고 마지막 한 주간은 그 고난이 더욱 집약되었지만 그 고난의 핵심은 십자가 죽음이었고 그 가운데서도 절정은 아버지 하나님의 침묵이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 아버지가 나와 함께 계신다 거듭 말씀하시던 주님은 (요 8:29; 16:32) 십자가에 달려 죽기 전 이렇게 외치셨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 27:46; 막 15:34).

 

가장 어려운 고난 곧 까닭 모를 고통의 정점이다. 우리 주님은 철저한 침묵 가운데 버림을 받으셨다. 그 고난을 피하게 해 달라고 거듭 간구하셨지만 결국 그 고난을 수용하셨고 마지막에는 아버지께 버림을 받으셨다. 왜? 우리 대부분이 경험하는 고통이 바로 그런 종류의 고통인 까닭이다. 아버지 하나님은 죽어가는 아들 코앞에서 문을 쾅 닫으시고 빗장을 지르셨다. 아들의 단말마적 절규를 끝까지 외면하셨다. 그런 버림의 결과 우리 주님은 우리 구원을 이루시고 우리를 죄와 죽음의 고통에서 건져주셨다.

 

전통 신학은 하나님의 고통을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의 고통 가운데 들어오신 하나님보다 저 멀리 높은 곳에 계셔서 구원 계획을 진두 지휘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많이 그렸다. 그러다가 지난 세기 두 번의 세계대전이 새로운 계기를 제공했다.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유대인 신학자 아브라함 헤셸의 영향이 컸고 각종 차별로 고통받던 이들의 경험도 힘을 보탰다. 그래서 하나님의 고통의 신학이라는 것도 등장했다.28) 물론 경험이 계시를 앞서간 것이 아니라 계시를 보는 눈을 열어 준 셈이다. 성경이 그리는 하나님은 스콜라 신학의 가르침처럼 조금의 동요도 없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의 아픔을 함께 느끼고 동참하시는 하나님임을 다시금 보게 된 것이다.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은 한 마디로 사랑이었다. 창조주가 피조물의 세계로 몸소 들어오셔서 그들의 고통을 직접 짊어 지심으로써 그들을 고통에서 건져 주시는 사랑이다. 고통은 죄의 결과요 구원의 부르심이요 훈련의 방법이지만 고통이 가진 가장 중요한 의미는 사랑이다. 하나님은 본디 사랑이시기에 인간의 고통은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는 계기가 되었다. 또 고통은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시는 방법이 되었다. 부당한 고통도 까닭 모를 고통도 하나님의 사랑의 계기다. 고통과 사랑이 뒤엉킨 인간 세상은 고통을 사랑의 계기로 이용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희미하게 반영한다. 결국 고통은 어느 것이나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릴 이유가 된다. 하나님이 고통 가운데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는 또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운데 고통을 받는다면 고통은 어느 것이든 하나님과 우리가 사랑을 주고받는 방법이 된다.29)

 

 2. 고통으로 나누는 사랑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핵심이다. 그 사랑이 우리에게 고통의 엄중함을 알려주고 이 땅에서 고통이 갖는 가치를 깨우쳐주고 또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까지 보여주었다. 이제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인간의 고통이 하나님의 사랑의 계기가 된 것처럼 우리의 고통을 서로를 사랑하는 계기로 삼을 책임이 있다. 처음에는 주님이 우리의 고난에 오셔서 우리 대신 고난을 받으신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이후 주님의 고난은 온 인류의 고난을 대표하는 고난이 되었고 주님의 제자들이 겪는 고난도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고난이 되었다 (벧전 2:21; 4:13). 우리가 주님과 연합되었다는 중요한 한 증거가 주님과 함께 받는 고난의 삶이다. 고난을 함께 겪을 때 왕노릇도 함께 할 수 있다 (딤후 2:12).30)


고통은 성도들 사이에서 큰 뜻을 갖는다. 우리가 한 성령을 마셔 한 몸이 되었음을 경험으로 확인할 수 있는 멋진 계기가 고통이다 (고전 12:12-26).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하는 것은 성도의 기본에 속한다 (마 11:17; 롬 12:15; 히 13:3). 성도는 고난이 올 때 기도한다 (약 5:13). 그와 더불어 질병은 성도의 교제를 위한 좋은 계기로 제시한다 (약 5:14-15). 같은 믿음을 가진 성도가 아픈데 내가 함께 아프지 않다면 우리는 한 몸이 아니다. 참된 교회가 경험하는 고통은 언제나 모두가 함께 느끼는 보편적 고통이어야 한다.

 

성도들 사이에 고통을 주고받을 때 고통의 실체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실천적인 조언이 있다. 칼뱅은 감정을 숨기려 애쓴 스토아 사람들과 달리 그리스도인은 고통과 슬픔을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31) 천국 소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죄와 고통의 실체를 알기 때문이다. 씨 에스 루이스도 비슷한 조언을 준다. 고통이 없는 곳으로 가셨다든지 주님과 함께 있을 거라든지 하는 덕담이 필요없다는 말은 아니다. 다 맞는 이야기다. 그렇지만 지금의 아픔은 그걸 몰라 겪은 아픔이 아니므로 소망으로 위로를 주고받을 때에도 지금 겪는 아픔이 정말로 아프고 정말로 힘들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죽음이, 고통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은 절대 해서는 안 된다.

 

고통을 계기로 불신자들에게 실천할 수 있는 사랑의 최고봉은 복음의 변증이다. 그러자면 개별적 고통을 보편적 고통으로 연결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개별 고통의 원인을 찾아 그것을 근거로 위로하는 일을 넘어 그 고통이 보편적 고통의 한 사례임을 일깨우고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전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서둘러 진통제를 줌으로써 증세 자체만 완화시키려 하지 말고 조금 아프더라도 그 증세가 죄라는 이름의 보편적 질병에서 오는 것임을 알려주어 고통을 통해 하나님이 주고자 하시는 가장 큰 복을 받게 도와야 한다. 루이스의 표현을 빌면 고통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확성기 소리를 듣게 도와 주어야 한다.

 

정말 어려운 작업이다. 아파서 우는 사람에게 어떻게 감히 그것이 복이라고 대놓고 말하겠는가. 그것이 죄 때문이라고 어떻게 함부로 말하겠는가. 주님이 가르치신 것처럼 그 사람의 고통이 그 사람의 죄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보편적 고통을 기억하고 보편적 죄를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개별 사건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벌 주시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해 주는 위로가 먼저 필요하다. 내가 겪은 아픔을 통해 공감대를 형성한다면 도움이 될 것이다. 그 사람의 고통을 나도 함께 느껴 적어도 너와 나의 보편적 고통이 되게 해야 한다. 그러면서 그 아픔을 전체 인류의 보편적 고통으로 연결하여 모든 고통의 원인인 죄를 말해줄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죄를 없애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전할 수 있을 것이다.

 

정말 어려운 일이다. 간절한 기도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타락한 본성이 여전히 자리를 잡고 있어 진정한 공감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아픔을 대신 지신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하신 말씀의 중요성을 거듭 확인해야 한다. 마음가짐은 온유함과 두려움이어야 한다 (벧전 3:15). 앨리스터 맥스래스의 말처럼 복음 자체가 이미 사람들 마음에 거부감을 주는 것인데 전하는 내가 거만하거나 무례하여 거부감을 준다면 복음을 변증하는 일은 더욱 어려워진다.32) 온유함은 내가 없어지고 온유하신 그리스도만 남는 것이다. 내 자존심, 내 권리, 내 잘난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 낮아져야 하고 나를 비워야 한다. 두 번이나 땅에 엎드렸던 아브라함의 태도를 배워야 한다. 또 두려움도 가져야 한다. 내가 복음을 변증하는 이 순간은 그 사람의 영원의 운명이 결정될 수도 있는 절대절명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주님이 하신 것처럼 우리도 고통을 사랑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죄가 있는 세상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사랑의 많은 부분이 고통이 있기 때문에 뜻을 갖는다. 사랑하기에 고통이 있지만 고통이 있기에 우리 사랑은 더 커지고 깊어진다. 고통은 어느 것이든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낸다. 고통은 주님과 우리가 사랑을 주고받는 방식이다. 따라서 우리 역시 어떤 종류의 고통이든 사랑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고통은 우리가 서로 사랑을 주고받는 방법이 되어야 한다.

 

3. 눈물 가운데 실천할 사랑

 

성경이 말하는 고통은 기원을 볼 때 죄와 밀접하게 이어 있지만 그 고통을 극복하는 과정에서는 사랑과 깊이 이어져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고통의 자리로 내려와 우리의 고통이 근본적으로 해결되었다. 주님의 고난이 우리의 고난을 없앴다. 이제 주님의 고난으로 구원을 얻은 자들에게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영광스러운 의무가 주어진다. 주님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은 자연종교가 가르치는 그런 고행을 하는 것과 다르다. 주님의 고난은 자신을 비우고 낮추어 우리를 살리신 일이다. 우리가 그 고난에 동참하는 것 역시 우리의 것을 최대한 활용하여 이웃의 필요를 채우는 일이다. 주님은 우리를 대신해 죽어 주셨지만 우리는 이웃 대신 죽을 수 없고 다만 재물로 이웃을 도우라 명령한다 (요일 3:16-18). 그것이 제자로 살며 겪는 고난의 중요한 일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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