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이란 무엇인가
성경은 하나님 나라의 언약서이다. 이는 언약에 의한 하나님 사역의 기록서이다. 그런데 하나님 사역은 중보자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을 주신 중보자를 통해서 역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보자에게 주어진 하나님 영은 언약의 영이다. 언약의 영이라고 함은 중보자와의 관계를 따라 역사하는 성령이라는 말이다. 여호와와 중보자의 관계는 백성과의 관계를 결정한다. 백성들은 각 시대에 세워진 중보자에 속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보자가 종이라면 그에게 속한 백성들도 종(머슴)이다. 그러나 중보자가 하나님 아들이라면 그에게 속한 백성들도 아들(자녀)이다. 이러한 관계를 따라 성령께서 역사하신다. 중보자와의 관계가 죄의 장벽이 있는 관계라면, 중보자가 죄 아래에 세워진 사람 중보자라면, 성령께서는 두려워하는 종의 영으로 역사하신다. 그러나 아무런 장벽이 없는 관계라면, 중보자가 종말에 보냄을 받은 하나님 아들이라면, 성령께서는 아들(양자)의 영으로 역사하신다. 이처럼 성령께서는 구약에서는 두려워하는 종(머슴)의 영으로, 종말에서는 아들(양자)의 영으로 역사하신다. 종의 영은 종(머슴)의 도리(모세율법)를 따라 종(머슴)으로 살게 하고 아들(양자)의 영은 아들의 도리(그리스도 복음)를 따라 아들(자녀)로 행하게 한다. 이처럼 성령께서는 언약의 영이시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
구원은 여호와의 통치 가운데 거함이다. 여호와의 통치 질서는 언약에 의한 관계에 따라 달라진다. 언약에 의한 관계는 어떤 중보자인가에 따라 결정된다. 죄 아래에 세워진 모세와 같은 사람 중보자라면, 여호와께서는 율법을 따라 백성들과 세상을 다스리신다. 따라서 612개 율법은 죄 아래에서 시행된 여호와의 뜻과 경륜이다. 이것은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 자녀를 대하는 부모의 뜻과 같다. 옛 백성의 완악한 수준에 맞춰진 여호와의 뜻이고 경륜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옛 언약에서의 관계는 종말에 보내신 아들을 통해서 온전케 된다. 율법 아래에서의 종(머슴) 된 관계가 아들(자녀) 된 관계로 완성된다. 그것은 612개 율법 항목은 죄 아래에서 시행된 여호와 통치 질서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종과 어린아이와 같음에 맞춰진 여호와의 뜻과 경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말에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유대 땅에 보내신 것이다. 이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를 구원하여 아들로 세우기 위함이다(갈4:4-5). 아들(자녀)로 세워짐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섬기는 자로 세운다는 말이다. 이는 율법으로는 누릴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는 말이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심도 믿는 자의 아버지가 되심에서 완전케 된다. 이처럼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섬김이 참으로 하나님을 알고 섬기는 일이다.
따라서 구원은 하나님의 통치에 거함이다. 구약에서는 여호와의 율법 통치에 거함이며 종말에는 그리스도의 통치에 거함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하나님 나라는 율법으로 경영된 다윗왕국이며 종말의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의 통치가 시행되는 천국이다. 이러한 하나님 통치에 거함은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에 있을 때 이루어진다. 종말에서의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는 예수를 통해서 주어진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런 장벽이 없이 하나님과 하나가 된 관계,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섬기는 온전한 관계에 들어서게 된다. 따라서 죄 아래에서 시행된 여호와의 옛 통치질서가 612개 율법으로 시행된 통치 질서이다. 따라서 여호와의 율법 통치는 참되고 온전한 통치가 아니다. 이는 종말에 아들을 통한 새로운 통치가 시행될 때까지, 한시적으로 시행된 과도기적인 통치 질서이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하나님의 통치에 거함이다. 구약에서는 율법 통치에 거함이고 종말에는 그리스도의 통치에 거함이다. 따라서 구약에서는 할례를 행하고 여호와의 율법 통치에 거해야 하며 종말에서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통치에 거해야 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거함은 언약에 신실함으로 이루어진다. 신구약 언약에 신실함이 하나님 통치에 거하는 일이다. 이처럼 신구약 언약에 충실하여 하나님 통치에 거함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다.
구약에서 주어진 구원
여호와께서는 아담과 선악과 언약을 맺으신다. 선악과 언약은 창조된 세상을 경영하기 위한 동반자 협정이다. 따라서 아담은 선악과 언약에 충실하여 역사를 동행하는 가운데, 하나님 뜻을 따라 세상을 관리하고 다스리는 하나님 형상이다. 아담이 죄를 범한 이후에도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함께하신다. 이러한 함께하심은 죄의 장벽이 있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진다. 이처럼 여호와께서는 아담과 노아, 아브라함과 모세와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에게 속한 가족과 권속, 백성의 하나님으로 역사하셨다. 그런데 모세 때에 이르러서 612개 항목의 율법이 주어진다. 이는 아브라함 후손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나라를 이루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백성들을 다스리실 통치 질서로 612개 율법 항목을 주신다. 따라서 노아시대 백성들은 중보자 노아의 하나님을 섬겨야 하며 족장 시대 사람들은 족장들에게 나아와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모세 때에는 모세의 말(율법)을 따라 여호와를 섬겨야 한다. 여호와께서는 중보자를 통해서만 말씀하시고 자신을 나타내시기 때문이다. 이처럼 구약에서의 구원은 당대 중보자에게 속하여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다.
그런데 개혁신학(칼빈주의 신학, 장로교 신학)은 인간은 율법을 지킬 수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이 능히 율법을 지킬 수가 있음을 강조한다. 그것은 612개 율법 항목은 여호와와 맺은 언약 내용이고 이스라엘과 세상에 대한 여호와 통치의 법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여호와께서 지킬 수 없는 내용으로 백성과 계약하시겠는가? 율법을 지킬 수가 없다면 왕이신 여호와의 권위가 어떻게 서겠는가? 백성들 가운데서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심이 고백이 될 수 있겠는가? 율법을 지킬 수가 없다면 여호와의 통치권이 설 수 있겠는가? 어떻게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알고 섬기겠는가? 따라서 성경은 인간은 율법을 지킬 수가 있음을 말한다. 세례요한의 부모 사가랴와 엘리사벳을 생각해보라. 누가는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였다고 평가한다(눅1:5-6). 사도 바울도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이었노라고 회상한다(빌3:6). 이처럼 모세율법은 언약 내용이고 여호와의 통치 질서이다. 이는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알고 섬겼던 생명의 법이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의로운 여부를 판단하는 의의 법이다. 그래서 예수께 나아왔던 청년도 어려서부터 모든 계명을 지켜서 유대 땅에서 큰 부자가 되었던 것이다(마19:16-20).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신 목적
여호와께서는 모세율법과 제도로 자신을 나타내시고 계시하셨다. 따라서 612개 율법 항목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구원과 생명의 법이다. 그들은 612개 율법 항목에 부착하여 여호와를 알고 누렸기 때문이다(신5:31-33). 그런데 율법 아래에서 여호와께서는 휘장으로 가리고 지성소에 계셨다. 아무 때나 누구든지 자신에게 나아옴을 금하셨다. 이는 죄가 여호와와 이스라엘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지성소와 성소 사이에 드려진 휘장이 말한다. 따라서 구약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여 교제할 수 없다. 그러나 언약에 신실하여 612개 율법에 부착하면 율법이 약속한 복을 누리며 살 수 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율법을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말씀하신다(신4:1, 눅10:28). 이 말은 612개 율법 항목을 행하면 가나안땅에서 살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가나안땅에서 산다고 함은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산다는 말이다. 그러나 부지중에 612개 율법 항목 중 하나라도 거스르게 되면 속죄제나 속건제를 드리라고 명한다. 이는 율법을 범한 죄를 속함을 받기 위함이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율법 통치 가운데서 살았다. 이것이 구약에서 주어진 구원이며 생명이다. 이것이 아담과 노아, 아브라함과 모세를 통한 옛 경륜의 목적이다.
그러나 율법에는 한계가 존재한다. 612개 항목의 율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절대적인 장벽이 있다. 그것은 율법은 죄를 없이 하지 못하고(히10:4, 11), 그 아래에 있는 자를 온전케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히7:16-19, 10:1). 612개 율법 항목은 죄 아래에서 시행된 여호와의 통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무리 율법을 지키더라도, 죄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며 하나님 아들(자녀)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아갈 때마다 반복적으로 피를 흘려야 하였다. 이러한 율법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신 것이다. 이는 율법이 주지 못하는 것을 주시기 위함이다. 이에 대하여 예수께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신다(마5:17). 율법을 완전케 함은 율법이 주지 못하는 것을 줌으로 완전케 된다. 따라서 율법이 개혁되지 않는 한 율법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다. 이는 죄를 없이하지 못하고 율법 아래에 있는 자를 온전케 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율법 아래에 있는 자를 온전케 하지 못함은 하나님 아들(자녀)로 세워지지 못한다는 말이다. 하나님 아들이 되지 못하면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섬기지 못한다. 그 결과 영원한 생명을 누리지 못한다. 이처럼 율법이 주지 못하는 것을 주시려고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신 것이다. 예수께서 율법의 요구를 따라 십자가 죽음을 죽은 것이다. 그것은 율법의 요구가 죽음이기 때문이다. 율법은 죽은 자에게는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된 자에게는 죄와 죽음의 권세가 미치지 못한다.
종말에 주어진 구원
율법과 복음에는 연속과 불연속이 공존한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우측 상향을 향하는 사선의 모습과 계단의 형식을 가지기 때문이다. 사선의 모습은 언약으로 연결되기 때문이고 계단의 모습은 언약의 갱신 때문이다. 이전 언약과 현재 언약의 연속성은 언약 때문이다. 반면에 언약의 갱신은 이전 언약과 새로운 언약과의 불연속성을 가져온다. 이러한 언약 갱신으로 인한 불연속성에는 여러 단계가 있다. 이는 어린아이의 성장 과정에 따라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것과도 같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중학교로 진학하면 새로운 차원의 교육과정이 시작된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에 고등학교로 이루어지는 진학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의 진학은 교육이라는 연속성과 함께, 새로운 차원의 교육이 이루어지는 불연속성이 있게 된다. 여기에서 불연속성은 새로운 차원으로 인한 불연속이다. 이러한 불연속성은 새로운 교육체계와 새로운 교육과정으로 인한 불연속이다. 이러한 불연속은 어린아이를 장성한 자로 성장시키는 과정에서 오는 불연속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역사도 언약을 매개로 하는 연속과 언약의 갱신으로 인한 불연속이 있게 된다. 따라서 율법과 복음의 불연속은 예수의 가르침과 사도들의 복음 증거에 필수적인 토대가 된다.
612개 율법 항목은 모세 언약 내용이며, 이는 옛 백성과 세상에 대한 여호와의 통치 질서이다. 그런데 율법으로는 죄와 사망의 권세를 벗어나지 못한다. 개혁신학의 주장처럼 아무리 예수께서 율법을 지키더라도, 율법의 정신까지 온전히 지킨다고 할지라도, 죄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는 율법이 죄 아래에서 시행된 여호와의 뜻과 경륜이기 때문이다. 율법 아래에 있는 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섬기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지 못한다. 그래서 종말에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보내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십자가 죽음을 감당하신다. 이는 율법 아래에 있는 백성을 구원하려는 아버지의 뜻, 죄와 사망 아래에 있는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신 결과이다. 이처럼 아버지를 신뢰하는 믿음으로 예수께서는 공생애 사역을 감당하셨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인하여 율법 통치는 종결되고, 율법과는 다른 새로운 통치가 시행된다. 새로운 통치에 들어가면 하나님 아들(자녀)로 세워진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섬기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진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보내신 아들을 통하여 율법 아래에 있던 자를 하늘로 들이신다. 율법 아래에서 종(머슴)이던 백성을 하나님 아들(자녀)로 세우신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 아래에서의 일들이 하늘에 속한 생명의 일로 완성된다(마13:16-17, 갈4:1-7, 엡2:6). 따라서 종말의 구원은 옛 언약의 목표이며 완성이다. 우리는 옛 언약의 완성된 열매를 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