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4-02-05 18:05
한국교회의 신학적 문제점
인쇄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250  

한국교회의 신학적 문제점

오늘날 무엇이 문제인가?


오늘날 한국교회 문제의 중심에는 잘못된 신학의 목사가 있다.

시작하는 말

현 한국교회는 위기에 있다. 80년대의 풍성한 은혜의 시대를 보내고 이제 교회 존립(存立)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 큰 도시의 대형교회들을 제외하면 소형교회들 태반은 여러 모양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런 모습은 최근 주 5일 근무제에 그 분명한 대안을 갖지 못하면서 더욱더 흔들리고 있다. 본 논문의 목적은 현재 크게 두드러진 한국교회의 문제점들에 대해 신학적 관점에서 살펴보는 것이다. 중요 내용의 범위는 한국교회의 신학적인 문제점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그 문제점에 대한 구체적인 해결책은 다루지 않았다.  

I. 한국교회의 신학적 문제점

최근 미국의 한 기독신문사는 목회자들이 생각하는 교회의 문제점을 조사했다. 물론 미국이었지만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이 문제점으로 삼는 주된 것들은 지나친 교회 성장주의, 목회자들의 세속화와 탈선 그리고 윤리 의식의 실종(失踪)으로 보았다. 한국교회의 신학적인 문제점들 가운데 먼저 극단적 이원론(二元論)을 다루려고 한다.

(1) 극단적 이원론(二元論)

한국교회의 신학적 문제로 먼저 극단적 이원론(二元論, dualism)을 들을 수 있다. 이원론은 일반적으로 근본적인 실재를 서로 대립하는 두 개의 것으로 주장하는 이론이다. 손봉호(孫鳳鎬, 1938- ) 교수는 이원론 정의를 “일반적으로 현실 전체 혹은 어떤 특정한 현실의 근본적인 기원을 서로 동등한 두 가지의 원칙에서 찾으려는 견해를 말한다.”라고 한다.

이원론이란 용어는 영국 동양학자 토마스 하이드(Thomas Hyde, 1636-1703)가 ‘고대 페르시아인 종교의 역사’(Historia religionis Veterum Persarum, 1700)라는 책에서 ‘선의 원리’와 ‘악의 원리’가 영구히 대립(對立)하는 종교체계를 이원론이라는 말로 부른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대표적 형태는 플라톤(Plato)의 이데아계(idea, 靈知界)와 감성계(현상계)에서 잘 나타난다. 그의 작품 ‘티메우스’(Timaeus)는 기독교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책은 우주론 요약으로 세상은 ‘데미우르게’(Demiurge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하며 혼돈된 물질 위에 형상의 패턴을 복사(複寫)했다고 한다.

플라톤은 주장하기를 학문은 ‘일시적인 것과 유한한 것’, ‘항상 변하는 것과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닌 것을 다루기 때문에 그것은 정확하게 진실이 될 수 없으며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는 한 영원하고 참된 것의 복사(複寫)요 상(像)이라고 한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플라톤의 사상이 유한(有限)과 무한(無限)의 차이를(the difference between the finite and the infinite)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사상은 서구의 철학사를 흘러 교부(敎父)들, 쯔빙글리, 칼빈, 그리고 키에르케고르 그리고 칼 바르트에서 변증신학으로 꽃을 피운다. 그는 이원론 사상을 설명하기를 “보이는 것들은 복사(複寫)나 유사(類似)한 것이지 그 자체가 영원한 것들이 아니다.”라고 한다.(All visible things are the copy and likeness, not the eternal things themselves. Timaeus 29c)

결국에 플라톤은 철저한 이원론 즉 실제와 현상, 이데아와 감각적인 대상, 이성과 지각, 영혼과 육신에서 전자가 후자보다 더 우월하다. 그의 이러한 사상은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철학자요 신학자였던 필로를 통해 클레멘트, 오리겐, 어거스틴 등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플라톤은 또 인간의 영혼의 불멸성(不滅性)을 주장하는데 후에 기독교 신학자들이 플라톤의 이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특히 해석적 관점에서 볼 때 알렉산드리아학파와 교부들은 플라톤의 이원론에 근거하여 성경을 알레고리 방법으로 해석했다.  

서구 철학의 이원론은 대표적으로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의 ‘정신과 물체’에 대한 그의 이해에서 철저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이 종교에서는 ‘빛과 어두움’, ‘선과 악’에서 나타난다.

기독교의 여러 개념이 또한 이원론적 대립의 구도로 이해되는 부분이 있다. 예를 들면 ‘천국과 지옥’, ‘육과 영’,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 등이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있다고 하여 기독교를 이원론의 종교라고 볼 수는 없다. 손봉호 교수는 기독교는 이원론을 주장하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의 절대 주권’ 사상은 이원론의 유혹(誘惑)을 물리치는 강한 무기라고 말한다.

초기 한국교회는 경건하고 헌신 된 선교사들을 통해 ‘건전한 신학’과 ‘경건한 신앙’을 이어받게 되었다. 이들을 통해 신학교가 세워지고 목회자가 배출되면서 한국교회는 일제(日帝)의 핍박과 6.25사변(事變)의 아픔을 이겨냈다. 그리고 80년대 한국은 고속 경제성장(經濟成長)으로 교회는 물질적 풍성함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격동기의 시련 과정을 통해 한국교회는 민족적 고통과 정치적 억압의 시대에 ‘현세와 내세’라는 도식의 이원론으로 빠져들었고 경제적 풍성함과 사회적 윤리적 자유의 시대를 맞이해서는 ‘교회와 세상’이라는 도식(圖式)의 이원론으로 빠져들고 있다.

‘현세와 내세’라는 구도에서는 기도와 기도원 그리고 치료의 은사와 신비주의의 강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교회와 세상’이라는 구도에서는 지상 교회 내에서 특별은총(特別恩寵)의 충만함을 강조하였고 일반은총(一般恩寵)의 영역으로서 세상에서는 특별은혜의 적용이 미약했다. 전자의 경우 초월적이며 종말론적 이원론이 강했으나 후자는 점차로 영역적 이원론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결국에 한국은 수직적 신앙의 형태에서 수평적인 신앙의 형태로 점진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이런 모습은 한국교회의 개인 구원을 중시한 보수적인 신앙과 사회구원을 주장한 진보적 신앙이 구원을 어떻게 이해하는 그 방식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며 또 교회가 외형적 모습을 중시하며 그 숫자로 많은 성장을 강조하는 오늘날의 목회신학에서 잘 나타난다. 따라서 한국 목회자들의 책임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극단적 이원론적 사고의 수정 없이는 참된 목회나 성도들 교육이 바르게 이뤄질 수 없다.  

또 한국교회는 극단적 이원론으로 인해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의 종말론적인 실현을 이 땅에서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교회 안에서는 천국이지만 교회 밖에서는 비(非) 천국인 장소로 인식하고 기독교인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삶의 모범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를 지나치게 이원론적으로 강조한 결과 성도들로 이 세상에서 적응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렸다. 즉 성도들은 자신이 출석하는 지역교회에 지나치게 비중을 둠으로써 그들이 사회에서 균형 있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

(2) 로마 가톨릭교회로 복귀하는 현상

두 번째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문제는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 의식(儀式)으로의 복귀(復歸) 현상이다. 모든 교회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오직 말씀’,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강조했던 종교개혁자들의 정신에서 조금씩 이탈하는 모습을 여러 면에서 볼 수 있다. 한국교회의 이런 문제점을 논하기 전에 먼저 로마 가톨릭교회가 교회의 본질에서 어떻게 벗어났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키프리안(Cyprian, 210-258)은 성례전(聖禮典, Sacrament)을 강조하면서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동일시하는 유형적 조직체로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회론에 기초석(基礎石)을 놓았다. “교회를 어머니로 가지지 않은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없다.”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또 “주교(主敎)로부터 분리되는 자는 교회로부터 분리된다.”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그는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라고 말했다.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 354-430)은 도나투스(Donatus Magnus, ?-355)와 논쟁을 통해 교회의 본질을 강조했다. 특히 예정론(豫定論, Predestination)의 입장에서 교회를 택함을 받은 자들의 단체 곧 하나님의 영(靈)을 받음으로 참된 사랑이라는 성품을 갖춘 성도의 무리로 생각하였다.

중세시대에 ‘교회’와 ‘국가’는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한 하나님의 두 권세로 보았으며 교회를 더 상위에 두었다. 후에 그레고리 2세(Pope Gregory II, 669-731)는 성직자들의 권위를 더욱 강화하고 로마 가톨릭교회 교황의 권위를 더 강화했다. 그리하여 성직자들을 평신도와 분리된 계급으로 주장했다. 그리하여 그들만이 성도들의 구원을 얻는 데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교회 안에서 실행했다.

또 로마 가톨릭교회는 자신들의 교회가 지상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로 착각하고 조직화 된 지상 교회를 강조했다. 결국에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교회와 성직자들에게 큰 역할을 둠으로써 교회와 성직자들의 권위를 더욱 강화시켰다. 이것은 분명 성경에서 벗어난 교회관이었다.

이와 유사하게 오늘날 한국교회 지도자들 역시 교회관에 있어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중세시대의 교회는 근본적으로 성직자들의 독점적(獨占的) 영역이었다. 그들은 교회 사역의 주인(主人)으로서 실질적인 권위를 가졌고 말씀의 권위보다는 교회의 전통(傳統)과 기구적인 교회 제도 그리고 외형적인 면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 역시 독재적(獨裁的)이며 카리스마(charisma, 권위적) 목회자들이 큰 교회를 맡고 있다. 이들의 지나친 카리스마의 남용은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오늘날 한국 대교회 목회자들의 권위는 로마 교황의 권세와 견줄 만도 하다. 이런 목회자들의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권위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교회의 머리 되신 주님의 권위는 사라지고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은 소외되고 있다.

로마 가톨릭 신학자 한스 큉(Hans Küng, 1928- )은 성령은 로마 교회와 사제들에게 제한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권위가 앞세워진 유형 교회에서 성령의 생명력 있는 역사는 자리를 잡지 못할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는 말씀의 권위 즉 복음의 권위를 바르게 시행해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권위적이며 독재적인 목회자들은 교회의 내적이며 영적인 면의 강조보다 외형적인 요소와 조직과 행정 등 제도적인 요소들을 강조한다. 외형적인 요소의 강조는 결과적으로 인간적인 행위가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만든다. 교회의 구성원들이 이런 행위와 외형적인 노력에 신경을 더 쓰게 된다.  

하나님 앞에서 ‘오직 은혜’를 강조하며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개혁자들의 정신과는 달리 인간의 외형적 행위에 강조가 심해지는 한국교회의 모습은 중세의 로마 가톨릭교회를 연상케 한다. 중세에 로마 가톨릭교회가 형식과 인간의 행위를 강조하는 것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形像)과 질료(質料)의 개념에서 영향을 받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 신학 때문이었다.

그의 신학의 중심사상인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완성한다.”라는 말은 로마가톨릭 신학의 핵심이 되었다. 그는 어거스틴의 은총론에 근거해 하나님이 인간의 회심의 원동력이라고 말했으나 은혜를 받아들이는 데는 인간의 자유의지(自由意志)를 강조했다. 따라서 후에 로마가톨릭에 구원에 있어 공로(功勞) 사상을 제공해 주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구원을 ‘말씀’과 ‘은혜’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이 같은 중세의 로마 가톨릭교회의 문제점들은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바로 이런 인간의 열심과 봉사를 강조함으로써 그런 외형적인 요소들을 신앙의 열매와 기준으로 삼는 경향을 보이는 점이다. 특히 세속의 문화와 물질주의에 영향을 받은 한국교회는 인위적인 교회의 행사와 외형적인 행위의 표출을 벗어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개혁자들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또 로마 가톨릭교회는 사도 베드로의 후계권을 주장함으로써 비역사적이며 비성경적인 교황권의 강화로 인해 개혁자들의 비판을 받았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의 일부 대형교회에서 담임 목사가 자기 아들에게 변칙적인 방법으로 자신이 섬기던 교회의 담임 목사직을 물려주는 후계 문제는 교회론의 심각한 변질을 보여주는 실례이다. 로마 가톨릭교회가 주장하는 사도 베드로의 후계권을 신학적으로 비판했던 개혁자들의 우려와 비판의 소리가 이들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3) 교회의 외형적 대형화

또 다른 한국교회의 문제점은 교회의 외형적(外形的) 대형화(大型化)를 지적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한국의 모든 대형교회가 다 잘못되었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큰 교회로서 말씀을 올바르게 전파하고 성례전(聖禮典)과 올바른 치리(治理)를 시행하며 그리고 평신도에 대한 철저한 제자훈련을 통해 성경적인 교회를 이룩하는 교회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한국교회는 세속적이며 또 인위적인 방법으로 교회를 외형적으로 대형화하려는 노력이 지속적(持續的)으로 시도되어왔다. 그러나 말씀의 굳건한 기초 없이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형제에 관심 없이 거대한 외형적 조직체로서 대형교회의 모습은 미래 한국 개신교의 장래에 심히 우려되는 바이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대형교회들은 여러 모양으로 많은 문제점을 표출하고 있다. 이 모습들은 사회에서도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런 대형교회의 출현은 먼저 목회자들이 외형적 성장에만 치중한 목회 철학에서 비롯된 것이다. 목회자들이 지나치게 교회를 외형적인 성장에 목표를 둔 것이다. 특히 로버트 슐러(Robert Harold Schuller, 1926-2015)의 영향으로 성장한 어떤 초대형 교회는 많은 목회자의 꿈이 되었다. 그래서 학자들 가운데 오늘날 한국교회에 교회 성장이라는 새로운 신화가 존재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 교회 성장론(Church growth)의 대가 맥가브랜(Donald Anderson McGavran, 1897-1990)의 ‘교회 성장이론’ 역시 한국교회의 대형화에 이론적 영향을 주었다. 이런 영향들은 결국 교회의 본질에 대한 목회자들의 인식에 많은 변화를 주었다. 즉 교회의 본질적이며 영적인 면보다는 외형적이며 형식적인 면에 더 많은 강조를 두게 되어 결국 초대형교회의 탄생을 보게 되었다. 또 한국교회의 대형화는 결국 미국의 상업주의와 실용주의 철학이 스며든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결국 초대 한국교회의 순수했던 모습과 개혁자들이 주장했던 올바른 교회의 본질에서 멀어지고 있다.(각 교파의 세계 최대 교회가 대부분 한국에 몰려 있다.) 

이런 대형교회로 인한 가장 큰 피해자는 주변의 소형교회들이다. 대형교회는 주변의 소형교회 존폐(存廢)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대형교회는 카리스마적인 당회장과 함께 최신의 모든 시설을 갖추며 교회 프로그램의 풍성함과 전문 교육자를 통한 봉사 그리고 교회 버스운영을 통하여 많은 성도를 예배당으로 끌어모았다.  

이런 결과가 나약한 작은 교회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많은 초년의 교역자들에게 목회에 대한 희망을 꺾어 버렸고 기독교 공동체의 일치성에 크게 손상을 가져왔다. 따라서 대형교회의 출현으로 한국교회 생태계에 지각 변동을 일으켰으며 수백 명의 목회자와 수천 명의 장로와 권사들이 함께 모여 봉사하는 초대형교회가 있게 되었다.

많은 대도시의 대형교회들의 경우에 수만 명의 성도를 가지며 거액의 헌금이 모이며 사회적 유명인사들이 교회를 매워가면서 교회의 문제점은 바로 담임 목회자의 힘 있는 모습 속에서 나타나고 있다. 또 대형교회가 보여준 문제점은 재벌 기업을 닮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대형교회 목사들은 재벌 기업의 왕 회장처럼 행세한다고 한다. 겸손하고 섬기는 종의 모습은 사라지고 지배하고 명령하는 과거 교황과 같은 권위적 변형된 성직자의 모습은 한국교회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

루터가 이런 잘못된 로마 가톨릭교회 성직자들의 문제점들을 바로 고쳤던 것을 다시 한번 되새길 필요가 있다. 얼마 전 한국의 어떤 대기업에서 누가 왕 회장의 후계자가 되느냐가 온 여론을 시끄럽게 뒤흔들었다. 이런 현상이 서울의 몇몇 대형교회에서 최근에 시끄럽게 기독교계와 일반 매스컴에 공개되었다. 교회의 담임목사의 아들이 대를 잇는 세습문제의 부작용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이런 절차는 아들의 목회철학과 인격에 대한 철저한 검증이 없이 또 교인들의 동의가 합법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위로부터 내려오는 강한 카리스마로 처리하게 된다. 어떤 학자들은 몇몇 대형교회에서 나타나는 목회자 세습(世襲)이 한국교회의 물량주의와 잘못된 소유의식에서 비롯된 것이고 비판했다.

이제 기존의 대형교회 지도자들은 교회의 성장과 발전에 급급하지 말고 이 시대에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도구로서 겸허하게 욕심을 버리고 모든 교회의 권세(權勢)를 주님께 맡겨야 한다. 아울러 우리 모두 기존의 대형교회를 검증하고 감시하고 비판하지 못한 책임을 느껴야지 않겠는가? 이것은 대형교회에 대한 간섭이 아니라 한국교회의 공동체를 회복하는 데 있어 절실한 과제이며 그리스도의 몸으로 구성된 유기체로서 교회에 대한 사랑이다.  

성도들이 대형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특별한 권리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이웃의 어려운 교회에 대한 책임과 가난한 이웃에 대한 구제와 봉사 그리고 부패한 사회 속에서 참된 성도의 삶을 실천하기 위한 그리스도 군사의 훈련장으로 삼아야 한다. 대형교회의 목회자가 사회에서 명예와 권위를 입는 것이 아닌 철저한 자기반성과 그리스도의 참된 사랑을 나누며 자신의 사사로운 생각을 버리며 주님의 참된 뜻을 실현하는 종으로서 모범을 보여야 한다.

(4) 개교회주의

한국교회는 그 저변에 개교회주의(個敎會主義)라는 사상으로 교회의 성장 신화를 이룩해 왔다. 그러나 지금의 시점에서 지나친 잘못된 개교회주의를 해체하고 기독교의 보편성(普遍性)과 통일성(統一性)을 추구해야 할 시대적 사명을 갖게 되었다.

개교회주의란 무엇인가? 주님의 교회로서 보편성과 통일성 그리고 우주적인 참된교회를 추구하지 않고 오직 유형적 교회로 자신의 지(支) 교회의 외형적 성장만을 목표로 두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런 한국교회의 개 교회주의가 나타난 배경에 대하여 어떤 학자들은 네비우스 방법의 부정적인 면이 바로 개 교회주의를 낳았다고 한다.

초기 한국교회가 외부의 도움 없이 스스로 경제적으로 독립하기 위하여 사용된 이런 네비우스 방법은 개 교회의 발전에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이런 면은 물론 잘못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자신의 교회만의 독립과 성장이 지상명령이나 되듯이 지나치게 될 때 타 교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또 개교회주의는 잘못된 교파의식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자신이 속한 교단의 강조와 타 교단에 대한 지나친 경쟁으로 기독교의 공동체 의식이 사라졌다. 이런 문제는 노회나 총회에서 타(他) 교단과의 교회의 통일과 협력을 이룩하지 못한 결과이다. 외국과는 달리 한국처럼 교파의 벽이 높아서 그 누구도 그것을 허물지 못할 정도이다.

이런 개교회주의는 자신의 교회만을 성장시키려는 세속적 사고에 집착할 때 더욱더 심하다. 교인의 숫자만 많고, 건물을 크게 짓고, 헌금이 풍성한 그런 교회관을 목표로 할 때 발생한다. 이런 교회관으로 성장한 교회는 총회나 어떤 단체의 의견도 듣지 않으며 심지어 자신들의 교회가 하나의 큰 독자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고 여긴다. 이런 교회는 기존의 교회의 법을 어기고 비상식적이며 비윤리적으로 방법으로 교회를 움직이게 한다. 이런 사상에는 교회의 종말론적이며 보편적 교회관이 사라지게 된다.  

개 교회주의의 심각한 원인 중에 근본적인 것은 지나친 무자격 목회자의 과잉 배출이다. 현 한국과 미주의 각 교단 신학교와 신학대학원에서 졸업하는 신학생은 정확한 통계를 알 수 없으나 상상을 초월한다. 따라서 많은 목회자가 서로 심한 경쟁을 해야 하는 결과를 만들었다.

어떤 학자는 그 나라의 젊은 종교인들이 지나치게 많아지면 나라가 부정적인 면도 많이 나타난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 이유는 사회적 활동과 봉사를 한창 할 나이에 비생산적이며 정적인 삶에 많은 에너지를 쓰기 때문에 국가적인 손실이 커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티베트와 같이 승려가 지나치게 많은 나라가 대표적이라고 말한다. 한국의 개교회주의 문제점은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첫째, 개교회주의는 기독교의 본질을 훼손시킨다. 

주위의 주님의 형제 교회들을 같은 공동체로 보지 못하고 교회들을 지나치게 경쟁적으로 보며 교회의 통일성과 협력을 파괴한다. 이런 결과는 이단을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게 하며 기독교가 감당하는 사명을 효과적으로 실천하지 못하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순교자의 피로 탄생한 기독교 교회의 권위를 추락시킨다.

둘째, 지나친 개교회주의는 독선과 아집으로 빠져 극단적으로 흐를 때는 이단으로 빠지기 쉽다.

특히 개 교회주의 속에서 강한 카리스마가 교회에 미칠 때는 이미 노회와 총회 그리고 교계의 올바른 조언을 더이상 듣지 않는다. 지난 과거를 보면 이단들이 어떻게 거대한 모습으로 형성되었는지 고찰하면 이런 개 교회주의는 심각한 문제이다.  

셋째, 개교회주의는 성도들을 교회에만 묶어 놓아서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 그리고 봉사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못하게 한다.

성도의 신앙생활의 영역이 교회 영역에 한정되어 역동적인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하지 못하고 지역적이며 현세적이며 형태적으로 흐르게 한다. 개교회주의의 사고는 하나님에 대한 봉사가 오직 개교회에만 국한되어 아브라함 카이퍼가 주장한 사회, 문화, 정치, 경제, 교육 등등에서 하나님의 영역 주권의 실현을 보지 못하게 한다.

자신의 대형교회를 사임하고 학교를 빌려서 예배를 드리는 김동호 목사는 한 일간지에 이렇게 말한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너무 교회만을 위해 살아왔어요, 그러다 보니 교회 일만 열심히 하고 사회에는 적응하지 못하는 이상한 종교인도 생겼지요. 건실한 사회인 특히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을 사는 지도자를 양성하는 데 교회의 역할을 집중해야 합니다.” 그의 말은 한국교회 성도들이 개교회주의에 묶여 사회에서 문화적인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점을 정확하게 지적하는 말이다.

(5) 한국교회의 무속적 요소들

현재 21세기 한국 사회는 무속(巫俗)으로 어울려진 희귀한 문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심지어 세계적인 예술인 백남준의 예술이 샤머니즘(shamanism)과 통한다는 논의가 일고 있다. 우리 사회는 무속이 마치 오늘날 미풍양속인 것처럼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로 우리의 시선을 속이고 있다. 이런 모습들은 국제회의 및 제 의식 그리고 대중매체를 통한 전파에서 찾아볼 수 있다.

몇 년 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가 주최한 샤마니즘 국제대회에서 학자들이 샤만 유산의 마지막 발견이 한국에 있음을 직시하면서 한국의 샤마니즘의 보존을 위한 연구가 심도 있게 발표되었다. 과거 역사 속에서 무속으로 종교화된 한민족 삶이 포스트모던(postmodernism) 시대에 새로운 문화를 입고 서서히 부활하고 있다.  

안타까운 현실은 한국의 사회단체가 행사에서 진혼(鎭魂)굿이 자연스럽게 수행한다고 한다. 또 최근에는 일간지들이 미신(迷信)을 조장하는 무속인 광고를 여과 없이 자유롭게 싣는다. 심지어 휴대전화나 무선 인터넷 서비스를 통한 무속인들의 활동은 어떤 상담자보다 인기가 대단하다. 서울 강남의 어떤 동네는 무속 왕국으로서 심지어 신세대까지 무속인들이 공략하는 모습이 매스컴을 통해 방송됐다. 무속(巫俗)이 판치는 한국 사회에서 교회는 미신(迷信)을 타파하고 사람들로 참된 진리를 바라보게 하며 참된 하나님을 믿도록 역할을 할 시대가 되었다.

샤마니즘(shamanism)에서 ‘샤만’은 시베리아 퉁그스족 언어 ‘saman’(주술사)에서 유래했는데 무녀(巫女), 예언자(豫言者), 의사(醫師)를 뜻한다. ‘샤만’의역할은 병마를 축출하고 재난과 불행을 예방하는데 주목적이 있다. 결국에 제사의식(祭祀儀式)의 실리 본위의 원시적 종교형태이다. 한국 무속(巫俗)의 기원이 언제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아주 오랜 고대사회 때부터 한민족의 주요한 신앙형태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학자들에 의하면 국조(國祖) 단군(檀君)이 무당(巫堂)이라는 설도 있다. 무속이 문헌상에 분명히 나타나는 것은 삼국시대로 김대문에 의하면 신라 2대 왕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은 왕호(王號)이자 무칭(巫稱)을 의미하며, 이 외에도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단편적으로 백제, 고려의 왕들이 무당을 이용한 기록이 있다. 이같이 한민족의 오랜 역사를 가진 무속은 오랜 세월의 흐름에도 한때 멸종한 듯하다가 최근에 한국의 불황과 직업의 불안정 속에서 대다수 사람과 특히 신세대 젊은이들 속에서 그 전성기(全盛期)를 누리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교회는 이런 무속(巫俗)이 난무하는 시대 속에서 이런 무속적 요소들로부터 자유로운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런 요소는 전도(傳道)에서 나타난다. 전도할 때 기독교를 기복(祈福) 종교로 오해시켜서는 안 된다. “예수 믿고 복 받으세요.”라는 말을 흔히 듣는데 이 말은 오해의 소지가 많다. 마치 기독교가 물질적인 축복을 제공하는 샤마니즘 종교로 인식되기 쉽다.

성경이 말하는 전도 내용은 예수를 믿으면 죄를 용서함을 받고 구원을 받으며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과 나 사이에 올바른 관계가 형성되어 이웃과 사회를 향한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하여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구호의 무속적인 위험은 예수를 믿는 것이 물질적인 축복과 정비례한다는 믿음이다. 한때 유행한 ‘삼박자 구원’처럼 예수를 잘 믿으며 잘 살고 내 영혼이 매사에 잘된다는 의미로 된다는 것이다.

결국에 이런 신앙은 현세(現世) 중심의 기복(祈福)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종류의 축복을 강조하는 신앙은 예수를 믿기 때문에 따라오는 영혼의 투쟁, 질병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 가난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찾아볼 수 없다. 영적이며 종말론적인 신앙을 강조한 바울의 경우는 오히려 반대로 고난의 모습들이 더 많이 나타난다.

어떤 교회는 그 사역이 성령의 역사와 샤마니즘적 형태와 차이점이 힘들 정도다. 성령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으로서 인격적이시며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시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카리스마를 강조하는 교회에서는 주로 성령은 병을 고치며 신비한 은사를 제공하는 영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분으로만 이해한다.    

무당의 역할이 병든 자를 고치는 주된 임무와 마찬가지로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병을 고치는 일에만 제한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성령이 오셔서 이 세상에서 역사하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제한하는 것이 된다. 이런 성령 하나님의 제한은 성령의 충만함이 인격적이며 형제를 사랑하고 사회를 위한 봉사로 이어지는 것을 망각(妄覺)하게 한다.

교회에서 봉사하는 일을 기복적(祈福的) 신앙으로 강조하는 경향이 많다. 이런 배경은 목회자가 건전한 신학을 알지 못하는 데서 기원한다. 만일 어떤 성도가 교회에서 물질적 드림이나 봉사의 일을 통해 하나님의 ‘물질 축복’이 자신을 위해 임한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기복신앙(祈福信仰)에 가깝다.

아무 조건(條件) 없이 감사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게 참된 헌신(獻身)이다. 어떤 대가(代價)를 기대하고 자연에 속한 물질을 드린다면 로마 가톨릭교회의 실수를 다시 반복하는 것이요 제물을 통해 현세에서 복을 얻으려는 무속적 기복신앙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과 봉사는 하나님의 은혜(恩惠)에 감사를 표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한 일이다.

(6) 목회자 윤리의 실종

한국의 많은 목회자가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獻身)과 기도 그리고 설교와 심방을 통하여 나타난 그들의 삶에 대하여 존경을 받아 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최근 지면에 쓰기 민망할 정도로 목회자 윤리(倫理)가 붕괴(崩壞)되고 있다. 기독교는 윤리에서도 성경을 기반으로 하는 최고의 윤리 종교이다. 따라서 목회자는 지도자로서 윤리의 모범이 되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오늘날 목회자 가운데 하나님의 선택 도구로 자신의 사명을 망각하는 이들이 많이 있다.  

최근 언론이 나타난 목회자의 윤리문제와 관련된 대표적인 사례를 보면 목회자의 윤리의 심각성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 몇 년 전 부천에서 자신의 교회가 부흥되지 않는다고 자신이 사는 이웃집들에 방화를 저질은 목회자가 있었으며,
  • 일만 악의 뿌리가 되는 돈에 노예가 되어 노름에서 번 돈을 주지 않는다고 채무자의 손을 자동차 바퀴로 밟은 목회자가 있었고,
  • 산업금융채권 위조단을 만들어서 개척교회를 세우며 좋은 일에 쓰겠다고 말한 모 신학교의 부학장이 있었으며,
  • 몇몇 목회자들로 만으로 구성된 교회가 교회 재정 사용을 문제 삼아 자기들의 공동체에 속한 한 목회자의 아내를 집단 살해하고 오랜 동안 시신을 부활시키려고 소동을 일으킨 목회자들이 있었으며,
  • 평소 지역 주민에게 존경받고 참신했던 목회자가 빚을 갚기 위해  외설적인 비디오를 제작하여 판매하려다가 적발된 일이 있었다.

이런 일들은 목회자 윤리의 전형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목회자의 윤리의 심각성은 바로 성적타락에서 심각성이다. 사람들은 이 시대를 감각(感覺) 시대라고 부른다. 다른 말로 감성(感性) 시대라는 말이다. 그 대표적으로 감각적 성(性)의 드러남이 현대사회의 큰 특징이다. 한가지 예를 들면 결혼 전 성(性) 경험은 해마다 그 비율이 올라가고 있다.

국내 모 대학생들의 순결(純潔) 의식 조사에서 절반 이상이 혼전순결을 안 지켜도 문제가 없다는 것으로 나타났다. 남학생이 여학생보다도 성욕이 강하다는 것에 반대하는 의견이 더 많이 나왔다. 이런 조사에서 보듯이 이제 젊은이들 사이에 기존의 성윤리(性倫理)가 다 무너지고 있다. 젊은이들 가운데 인생을 쾌락적(快樂的)으로 즐기고 보자는 사고(思考)로 전환 되고 있다.  

사회는 사회대로 많은 인터넷 음란(淫亂) 사이트가 극성을 부리고 있다. 무작위로 수시로 많은 사람에게 매일 공격적으로 이 메일(e-mail)로 음란물(淫亂物)을 전송하고 있다. 심지어 청소년들의 이 메일에까지 보내고 있다. 이런 가운데 바로 성적인 탈선의 문제는 이제 목회자들에게 예외가 될 수 없게 되었다.

기독교 여성상담소에 따르면 1998년 7월부터 2000년 10월까지 교회 내 성폭력 건은 51건이었으며 이중 목회자 관련 성폭력(性暴力)은 46건으로 나타났다. 한국성폭력상담소 1999년 통계에서도 성직자 관련 성폭력 신고 건은 모두 32건이다. 하지만 감추어지고 알려지지 않는 성폭력의 특성을 고려할 때 목회자의 이성(異性) 문제는 너무나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목회자가 이성(異性)과 불미스러운 문제로 교회로부터 사임을 강요당하거나 교회를 떠나는 일이 이제 비일비재하다는 사실이 이 같은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성적 타락은 목회자에게 치명적인 것으로 성(性) 개방 시대에 목회자의 윤리 의식에 대한 철저한 교육과 검증 그리고 철저한 책임이 요구되고 있다.

또 목회자의 탈선은 교회 재정(財政) 관리 문제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최근 미국의 복음주의 학자가 한국에서 열린 세계 복음주의 신학회에서 발표하는 내용 중에 미국의 대형교회의 목회자들 역시 고액(高額)의 사례비를 받고 있다고 비판했다.

최근의 한 언론에 보도된 바에 의하면 한국의 어는 초대형 교회의 목회자는 연 1억 정도의 십일조를 교회에 헌금한다고 한다.(연간 수입이 10억이라는 말 – 편집자) 요즘 한국 어떤 목회자는 조용한 사임이나 퇴임을 조건으로 교회와 거액을 협상하는 실정이다. 교회 재정과 관련해 어떤 목회자는 교회 재정을 개인 용도로 사용하고 심지어 성도들의 헌금까지 부당한 방법으로 횡령(橫領)한다고 한다.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을 유혹하는 또 다른 것은 명예(名譽)에 대한 욕망이다. 무슨 협의회 회장이니 노회장이니 총회장이니 하는 명예의 타이틀에 목매는 목회자들이 많다. 그 명예의 직함보다는 섬기는 리더로서 봉사하는 종으로서 그 사역을 모든 사람의 추천과 자신의 헌신 된 마음으로 그런 일을 한다면 너무나 아름다울 것이다.

그러나 그런 명예가 걸린 일에 서로 하려고 세상 술수와 야비한 방법을 쓰고 그것도 돈을 뿌리며 상대 후보와 깨끗하지 못한 경쟁을 통해 선거에 이기려는 현상은 목회자의 윤리에 심각한 병리(病理)이다. 최근 어떤 교단에서는 제비뽑기를 통하여 총회장을 선출했다. 이것은 학자들이 오래전부터 주장해 왔던 것으로 한국교회의 장래를 희망으로 이끌 수 있는 좋은 사건이다.

또 최근 한국교회는 목회자들이 지나치게 권위(權威)를 주장한다는 비난의 여론이 높다. 목회자들 역시 개 교회에서 지나친 자신의 권위를 강조하지 말고 평신도에 대한 배려와 그들이 개 교회에서 받은바 은사를 충분하게 사용하여 주님의 교회를 바르게 성장하는데 도와주어야 한다.

교회는 목회자가 왕 같은 지위를 행사하는 곳이 아니다. 손봉호 교수는 대형교회의 목회자들이 대부분 목에 힘을 너무 준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그렇지 않은 분은 많지 않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목회자의 윤리에 대해 몇 가지의 좋은 조언을 한국교회에 남겼다. 한국복음주의 협의회와 한국기독교총연맹의 목회자 윤리 강령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특별한 부름을 받아 하나님 백성에게 그의 말씀을 가르치고 그 말씀대로 살도록 지도하는 사명 받았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자신이 먼저 하나님 말씀을 올바로 알아야 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는 데 있어 모든 성도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스스로 지키지 않는 가르침은 위선이요, 성도들의 성화와 복음전파에 큰 방해가 된다.

2. 한국교회 문제 극복을 위한 과제

▸ 한국교회는 잘못된 극단적 이원론의 세계관을 버리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과 분리되어 내세에 가는 곳이 아니라 바로 이 땅 위에서 종말론적으로 실현되어가는 과정임을 교회에서 주장해야 한다. 세상에서 도피하거나 적당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 기독교 세계관에 근거한 문화의 개혁자로서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강조해야 한다.  

▸ 잘못된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이제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은혜가 강조되며, 오직 주님의 권위, 말씀의 권위, 성령님의 권위가 시행되어야 할 것이다. 지나친 목회자의 카리스마와 맹목적 권위보다는 목회자의 참된 기능과 평신도들 은사에 따른 교회 지체로서의 참여가 요구된다. 이렇게 될 때 한국교회는 오늘날의 문제점들을 극복할 것이다.

▸ 한국교회가 지금과 같은 모습의 대형교회를 선호하고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실현에 걸림돌이 될 것이다. 우리 모두 대형교회가 참다운 교회의 모습을 되찾고 올바른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감시와 철저한 비판이 필요하다. 이런 사역을 통하여 약화 일로에 있는 한국교회에 새로운 성령의 역사와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질 것이다.

▸ 과거 한국교회는 개 교회주의의 긍정적인 면을 통해 교회에 대한 사랑과 기도 헌신과 봉사를 통하여 교회를 성장시켰다. 그러나 지금의 시점에서 개 교회주의는 기독교의 연합성과 통일성을 간과하여 지나치게 세속적인 모습으로 변해 버렸다. 이런 잘못된 개 교회주의 사고를 과감하게 떨쳐 버리고 모든 교회는 주님의 교회라는 사고의 실현화가 요구되고 있다. 이런 일을 통해 한국교회는 올바른 말씀의 적용과 성령이 하나로 매는 역사를 통하여 새롭고 건전하게 성숙해질 것이다.

▸ 한국교회는 샤머니즘의 요소들을 스스로 버릴 때가 되었다. 과거 경제적 어려운 시대에 기복적 물질의 풍성함에 대한 강조는 사람들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기복적인 강조는 기독교의 본질을 흐리게 한다. 한국교회는 성경대로 축복을 바르게 가르쳐야 한다. 성령 하나님에 대해, 교회에 대해, 예배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올바른 신학을 가르쳐야 한다.

▸ 또 현세 중심적 구원의 축복은 이제 수정되어야 한다. 참된 축복은 그리스도를 통해 점진적으로 완성되어 가는 것이지 현세에 결코 완전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줘야 한다. 우리가 사는 이곳은 완성된 천국이 아니기 때문이다.  

▸ 이젠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은 자신을 돌아보고 올바른 목회자 윤리에 대한 의식이 먼저 새롭게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이 일관된 지적이다. 목회자는 신앙과 윤리가 조화를 이루어 타의 모범을 보이며, 비성경적 권위주의를 탈피해야 하며, 주의 종으로서 청지기 의식을 가지며, 영성뿐 아니라 전인격의 수양도 필요하다. 복음전파에 헌신한 바울을 보면서 다시 한번 윤리가 무너져 가는 이 시대 속에서 목회자 윤리의 회복을 위한 성령의 역사를 기대해 본다.

마치는 말

한국교회의 신학적 문제점들은 다양한 한국적 상황에서 형성되었다. 또 현대의 세속적 사상에 의해 교회가 변질이 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한국교회 역시 중세의 로마 가톨릭교회의 전철을 많이 닮아 가는 현상은 한국교회가 성경에서 점점 벗어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한번 한국교회는 성경의 권위를 지키며 신학과 목회가 성경으로 검증받아 참된 교회를 위한 올바른 신학의 모습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의 신학적 문제점은 이제 그 극복의 과제를 남겨 두고 있다.(*) 글쓴 이 / 안명준 교수(평택대 조직신학) 출처 : https://godpeople.or.kr/mopds/34033

안명준(安明俊, 1955- ) 독립운동가 안봉순 선생의 손자이며, 중앙대학교 전기공학과 졸업, 합동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석사M.Div., 미국 리폼드신학교 신학석사〔Th.M.〕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신학석사〔Th.M.〕남아공 프레토리아대학교 교의학 전공 철학박사〔Ph.D.〕칼빈의 해석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평택대학교 신학부 교수로 재직하며 조직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세계개혁신학회(IRTI) 한국대회 준비위원과 요한 칼빈 탄생 500주년 기념사업회 실행위원장,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사업회 실행위원장을 역임했다. 2019년 개혁교회 종교개혁 500주년 공동위원장을 맡고 있다. 현재 한국장로교신학회 회장으로 있다.


 
 

일반형 뉴스형 사진형 Total 3,369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3337 젠더 이데올로기 문제와 비판 웹섬김이 02-05 255
3336 참 믿음은? 웹섬김이 02-05 254
3335 성화란 무엇인가? 웹섬김이 02-05 254
3334 개혁파교회가 믿는 예배의 성경적 의미 웹섬김이 02-05 246
3333 예정과 인간의 책임 어떻게 조화할 것인가? 웹섬김이 02-05 237
3332 한국교회의 신학적 문제점 웹섬김이 02-05 251
3331 고전15:29 죽은 자를 위하여 세례를 받는다는 … 웹섬김이 01-14 308
3330 동성애자의 문제는 무엇인가? 웹섬김이 11-23 728
3329 요16장의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 웹섬김이 11-21 379
3328 예배 사역자에게 필요한 15가 웹섬김이 11-03 428
3327 목사들이여, 스펄전·로이드 존스처럼 늘 읽… 웹섬김이 11-03 545
3326 아마겟돈, 3차대전… 선교 방해하는 악성 종… 웹섬김이 11-03 414
3325 성경 원본은 어디에 있나요? 웹섬김이 11-03 371
3324 유아세례와 모태신앙 웹섬김이 11-03 380
3323 100가지 응답받는 기도의 비결 웹섬김이 10-22 479
3322 복음서의 기록 웹섬김이 10-04 725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