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신학의 개요
이탈리아의 플로렌스 도시에서 시작된 르네상스 운동은 인류역사에 새로운 변화를 몰고 왔다. 문예부흥은 고대 헬라와 로마의 인간 중심적인 연구를 부활시킴으로서 인간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강력하게 주었다.
이 운동은 종교적으로 에라스무스나 부데와 같은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을 통하여 종교 개혁자들에게 신학적 방법론에 큰 영향을 주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체계적이고 보편적인 현대신학은 일반적으로 말하여 스위스의 조그마한 마을 자판벨에 있는 칼 바르트의 서재에서 1919년에 출생한 것으로 본다. 물론 이 연도는 칼 바르트의 세계적인 명저 ‘로마서 강해’의 출판을 말하는 해이다. 물론 바르트 이전에 현대적인 사상을 가진 신학이 있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 신학을 지금의 현대신학과 분명하게 구분하여 그 명칭을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부른다. 이 신학의 아버지는 자타가 공인하는 슐라이어막허이다. 그 이후에 리출, 헤르만, 하르낙, 바우어, 스트라우스, 슈바이처 등이 있다. 이들의 영향을 통하여 현대 신학자들이 태동되었다.
그런데 현대신학이란 용어는 이해하기 힘든 용어들과 사변적 개념들이 즐비하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현대신학은 단지 추상적 세계를 논하는 것이 아니다. 그 당시 처한 상황과 상황에 관련된 문제들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좋은 의도에서 시작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현대신학이 우리를 짜증나게 하는 이유는 성경적 정통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과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음에 대한 답을 과거신학이 아닌 현대신학으로 잘못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상황은 변한다. 그러나 성경은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불행하게 현대 신학자들은 변하는 상황에 우선성을 두는 것이다. 그들은 성경도 과거의 산물로 보기 때문에 그들에게 주어진 상황과 자신의 이성을 자신들의 유일한 준거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니 현대신학이 우리에게 생소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첫째, 자유신학이라는 현대신학이 어떻게 성경적 정통에서 벗어난 것을 발견하기 위한 것이고, 둘째, 현대신학이 어떻게 그 당시 처해 있던 상황에 대한 물음에 - 현대 신학자들 자신이 가졌던 물음들을 포함하여 - 답하려 했는가를 살핌으로 그 오류에 빠지지 않고 우리들의 물음에 관한 답을 성경 안에서 찾고자 하는데 있는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큰 이유를 토대로 우리가 현대신학에 관심을 두는 이유들을 다음과 같이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신학은 우리 기독교가 지켜왔던 정통신학에 큰 도전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는 신학을 부정하고 우리가 지니고 있는 신앙을 부인한다는 것은 보수신학의 존재를 위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신학은 성도들의 영적성장을 방해하고 신앙의 순수성을 더럽히기 때문이다. 현대신학은 사탄적 요소가 있기 때문에 성도들을 혼란케 하며 그들의 믿음을 흔들 것이다.
●우리의 성숙된 신학과 신앙의 테스트가 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성숙하지 못한 성도들은 현대신학을 대함에 있어서 조심해야 하며, 현대신학에 관심을 둠으로 우리들의 신학과 신앙을 재점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보수 진영이 자유 진영으로부터 많이 받는 비판은 우리가 지적 능력이 부족해 현대신학을 이해 못한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함이다. 어려운 철학이나 사상을 논하는 자유주의자들은 성경만을 이야기하고 영성을 강조하는 보수주의자들이 지적 수준이 낮아 그런 것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오해를 불식하기 위해서 현대신학에 관심을 갖고 비판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현대신학에 관심을 두는 것은 현대신학으로 인해 성도들, 특히 지적인 것에 관심을 갖는 성도들이 가질 수 있는 보수신학과 신앙에 관한 도전과 의문을 치유하기 위함이다.
●현대신학은 보수주의보다 우리가 처해 있는 현 상황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현 상황의 신학적 문제가 무엇이고 고민이 무엇인지를 현대신학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 물론 현대신학의 답은 틀린 답이다. 그러나 우리도 문제를 알아야 대안을 줄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현대신학은 우리의 신학적 관점을 깊게 만들어 준다고 하겠다.
●현대-자유주의자들도 우리의 전도 대상이다. 그들의 잘못을 지적해 주며 그들에게 올바른 신학과 신앙의 길을 제시해야 의무와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현대신학에 관심을 둘 필요가 있다.